아들 장가보내기.

2007. 7. 20. 22:25나의 이야기


어릴적에 내가 살던 좌천동 산동네밑에 그 당시에 고무신 신발공장이 많았습니다.
범일동 철길건너 왕자표 국제고무 그옆에 범표 삼화고무 가야에 말표 태화고무등 
당감동에 지금의 르 까푸의 전신인 기차표 동양고무등 많은 신발공장이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집사람괴 일찍 연애라는것을 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얘기지만 내가 17살때 범일동에 있던 국제고무라고 
양정모 사장이 운영하던 신발공장에서 만났습니다.
내가 입사할때에는 왕자표 국제화학이었습니다.
그 후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회사를 끌어모으고 종합상사로 등록하게됩니다.
원래 일반 공장에도 미성년자를 고용하면 부모동의서라는것이 있어야할 
정도로 나이가 어려서 우여곡절끝에 범일동 공장에 입사를 하게되었습니다.
신발이라는것이 크게는 세가지 공정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신발의 밑창을 만드는 고무 프레스성형입니다.
고무재료를 틀에넣고 열을가해서 누르면 성형틀에 고무창이찍혀나오는것입니다.
둘째로는 갑피라고 신발의 위 천이나 가죽으로된 재료를 조각조각 미싱으로 조립을해서
발을 감싸는 위의 천을 갑피라고합니다 ,완성된위부분을 갑피라고 합니다..
주로 미싱이 전체의 일을합니다.
셋째는 이 밑창과 위의 갑피를 금형틀에 씌워서 모양을 만들고 거기다 밑창을 붙혀서 
신발의 모양이 만들어지면 이 것을 가류가마라고 증기 압력솥에 고온고압으로 쪄서
꺼내면 비로소 신발이 되는것입니다.
이외에 그 것을 검사해서 불량을 가려내고 여러가지공정이 있으나 대강 생락합니다.
이 신발공장에서도 일을 무지 시켰습니다.
월급이래야 지금돈으로 치면 약 6~70만원수준이 되는것같습니다.
아여튼 저임금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발을 만들면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외화획득한다고 
나라에서 엄청난 혜택을 주었습니다. 
그 때는 노조도 없고 말않들으면 짤리면 갈곳도 없던 시절입니다.
저임금으로 겨우 밥먹고 저축은 꿈도 못꿀정도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부려서 양정모씨는 엄청난 재산을 불립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의 지원을 등에업고 국제상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종합상사로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하게됩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회사가 동해투자금융 국제운송 국제상사 등등 
하여튼 엄청나게많은회사를 거느리고 대기업으로 커가다보니 
회장혼자서 운영하다보니 시간도 부족하고 업무를 다 못챙기다보니 
정권이 바뀌고 돈을 좋아하는 자가 권력을 잡으니 돈을 넌지시 요구 해도 
내가 힘들여 벌은돈 왜주느냐고 하면서 튕기다 밉상을 받았는데
연말에 최고권력자가 연 기업인격려 만찬에 눈이 내려서 약속시간을 
많이 늦게 도착해서 또 눈밖에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시켰는지 알아서 기었는지 제일은행에서 돈줄을 잠궈
버렸습니다. 원래 범일동 공장옆에 제일은행이 국제고무보고 은행을 
차릴정도였으니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가시겠죠.
그리고 모든일에 나라에서 브레이크를 걸어버립니다.
결국 어음은 돌아오고 돈이 나중에는 돌아가도 지금 어음을 못막게되어서 
돈이 많이 가지고 부도가 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나라에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공중분해를 해버립니다.
그 당시에 한일합섬의 김택수 회장이 나라에 성금도 많이 내고 
권력자에게 뒤돈을 좀 쥐어줍니다.
그렇게 되자 알짜배기는 한일합섬으로 모두 넘어가버립니다.
이것이 양정모씨의 말로였습니다.
그 당시 여중이나 초등학교를 나온 여자공원을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야간에 학교도 열고 공부도 가르쳐서 정규 고등학교과정 까지 
배우게 한것이 제일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던것입니다.
그 고무신 공장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고무 가루가 펄펄날리는 배합반에 사람들이 목욕할수 있는 목욕탕이 
지금보면 도랑물만도 못한정도이고 심지어는 화장실이 중국식입니다.
한칸에 두사람씩 볼일을 보는정도이고 정말 그렇게도 우리는 살았습니다.
우리집사람은 제화부의 신발코를 만드는 사람으로 아주 상급기술자였습니다.
신발의 코는 신발의 기준이 되는것이고 아무나 할수 없는 기술로(쓰리꾸미)
그런 숙달된 기술자만이 이 일을 하는데 보통 3년이상의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신발의 코를 이태리제인 톨라스터나 뒤굽을 만드는 힐라스터 같은 기계를 
비싼돈주고 수입을 하지만 그 당시는 모두 오로지 손으로 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본말로 다이싱이라고 코를 예쁘게 모양내는 기계를 했습니다.
이 신발 산업이 일본사람에게서 배워본 기술이다보니 용어가 거의 일본말입니다.
둘이 일하는 자리가 바로 옆이다보니 장난도 치게되고 한 한이년 같이 있다보니
서로의 많은것을 알게 됩니다.
범일동에서 일마치고 걸어서 영도 다리 까지 걸어서 서면까지 돈이 없으니 
워킹 테이트를 합니다.
어찌 그럭저럭하다보니 몇살안된놈이 나보다 한살많은 여자애하고 눈이 맞아서 
잘 놀러도 다니고 그렇게 지내다가 우리집을 한번오고 두번오고 하다보니 
일이 어찌 그리그리 되었습니다.
일이 이리 되다보니 우리집 사람이 아버지가 엄한지라 이제는 집사람 집에서 
눈치를 채고 아버지가 딸을 잡으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우리집에 숨게 되어서 그냥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집사람은 이제 갈곳도 없는 사람이되어버려서 
천상 나와 살게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괜찮은 눈치고 그냥 마음맞춰서 그럭저럭 살다가 
아들이 4살되던해에 처가집을 찾았습니다..
세상은 또 그렇게 살아집디다..
장인이 나를 싫어해도 어찌하겠습니까. 
이제와서 4살 아이까지 있는데 도로 물릴수도 없고 그냥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참아야지 어떡하겠습니까....
그렇게 처가와 왕래가 잦아지고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집사람 생활력이 강해서 철없는 나이어린 신랑만나서도 
살림을 잘 꾸려 이만큼 튼튼한 가정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문제 입니다.
아버지를 닮았으면 연애같은것은 문제도 없을텐데 이게 엄마를 닮았는지
여자애를 잘 못 구슬립니다.
고등학교때부터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한다고 여자를 못 사귀더니 
대학교도 공과대를 가서 여자가 없는산업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우리 아들 거기다가 녹산끝에 남자들만 있는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경리까지도 아줌마이고 근처에는 공단이라서 여자 구경도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여자를 접할기회가 없어서 그런것을 알수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들보다 못생긴 친구는 아가씨 구하러 교회를 자주 다니더니 
벌써 결혼해서 아이돌까지 지낸애들이 여럿있는데 말입니다.
대학 후배의 소개로 법원에 기능직으로 다니는 아가씨를 작년겨울에 소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영 잘 않풀리는것입니다.
아들과 사귀던 아가씨가 나이가 아들보다 두살많고 공무원생활로
좀 많이 닳아서 남자를 다루는법에 조금 익숙하는것 같습니다.
아들이 매일 우리말로 하면 시다바리하는수준입니다..ㅎㅎㅎ
뭐 자기네집에 무슨일있으면 불러다 일시키고 자기가 어디갈때는 
아들불러서 차를 타고가고 이런식이 되다보니
우리아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올랐나봅니다.
그래서 설을 전후해서 남천동쪽에 언니네 태워달라고 해서 아들이 불러나가더니만 
몇시간뒤에 돌아왔는데 이제는 만나지않겠다고 결별선언을 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 잘했다. 남자가 여자한테 질질 끌려다니면 평생이 괴롭고 
공처가 신세 못면한다...
그 여자애가 공무원이다보니 돈벌이나 직장이 신이 내린직장이라고 해서
아주 좀 교만한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인연이 아니면 빨리 헤어지고 다른 인연을 찾아보는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갈라지고 깊은 정이 들기전에 헤어진것은 잘한것 같은데 
집사람이 아파트 옷수선집에 가서 옷을 수리하러갔다가 
누가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를 부탁한다기에 
집에 아들이 직장 다닌다고시간이 없어서 여자를 못구했다하니 
서로의 전화번호와 이름과 출생시를 주고 받았습니다.
요즘 몇번 만나는것 같기는 한데 말입니다.
내가 성질은 급한가 봅니다.아들이 공무원한다는 여자애를 만날때 
야 , 이게 결혼 준비를 해야겠수나 생각에 덜렁 집부터 하나 장만하게되었습니다.
남자가 장가를 갈려면 전세방이라도 있어야 여자가 들어오지요.
동물의 세계에서도 보면 뇌조 같은새는 풀을 양쪽으로 쫙 세워서 집을 짓고 
암컷이 그 집이 마음에 들면 혼사를 치르는데 사람역시 남자가 집 장만하고 
여자가 살림차리거 아이를 키우는것이지요..
그래서 있는주식 오르기도 전에 몽땅 팔아서 집을 샀더니만 집값은 떨어지고 
주식은 천정 높은줄 모르고 올라가고 특히 내가 가지고 있던것만 
두배 세배이상올라버렸습니다.
삼성테크윈,삼성물산 삼성중공업서울식품 LS전선 삼성정밀화학 ...
아깝지만 이미지나간 물인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이제 다 날려버렸버렸지만  아들이 빨리 결혼만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일찍 살림을 차리고 살아보니 늦게가면 아이키운다고 그리고 집장만 한다고 
좋은 나이에 황금기가 너무 쪼들리는삶에 아이가 대학가면 
아버지는 직장에서 짤리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만큼 싸이클이 늦어지면 자기가 더 어렵고 괴로워지는것입니다.
내친구들 이제 돈벌이도 않되는데 대학 등록금 준비한다고 허리가 휜다고 합니다. 
나는 벌써 끝난일을 말입니다.
매도 먼저 맞는놈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더 힘들어지니 빨리 댕겨서 
정리하면 자기의 인생이 편안해집니다.
빨리 아들의 짝이 어디 있는지 발리 결실을 맺기를 바라고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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