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보너스인생.

짬스탑 2009. 6. 19. 16:59

 

6,25때 피난가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장기려박사.

허파에 물이 차면 마른땅에서도 익사를 한다고 하니 이게 무슨 우스운 소리인가 하면은 .. 우리가 하루에 매일 쉬지않고 호흡하는 가운데 산소는 마시고 이산화 탄소는 내뱉는데 그것이 원활하지 못할때는 이산화 탄소배출이 어려워서 그것이 폐속에서 수분으로 변해서 물이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심장이 고장나서 빨리뛰는 바람에 마시는 공기는 마시는데 내뱉는 공기를 방출을 못하게 되었으니 그 탄소가 새공기와 만나서 물이 되고 그물이 계속 쌓여서 폐속에 물이 차고 그럼 호흡곤란이 이어지고 나중에는 폐에 물이 많이 차서 익사하게되는것입니다. 사람죽고 사는것 별게 아닙니다. 그냥 호흡이 멎으면 죽는거지요.. 그렇게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일하고 있는 집사람을 전화로 보호자를 부르고 친구도 불럿습니다. 이곳 규정이 가족외의 보호자가 한명 보증을 서야된다고 합니다. 혹시 돈 못내고 죽으면 그것을 보장하기위해서 가족외의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ㅎㅎ 목숨보다도 돈이 우선입니다.. 남들은 지금 죽지 않을 정도이면 모두 강제 퇴원을 시키는데 나는 이넓은 병원을 내마음대로 산책다니는 특별한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주 위급한 환자들만 데모중이니 관리 하기 좋게 한병동으로 모았습니다.. 저녁에 응급실에서 심장박동이 좀 떨어졌기에 병실로 옮기는데 평소같으면 병실이 나야할때 까지 특실이나 응급실에 계속있어야 하는데 모두 강제 퇴원을 시켰으니 병실이 남아돌고 최소인원의 의료진이 돌보기때문에 모두 5병동으로 8층에 모았습니다.. 거의가 다 죽을 환자나 항암치료중인 그런 위급환자를 모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숨쉬는것이 옆꾸리가 결리는데 교수님이 회진돌때 물어보니 아직 폐속에 물이 많이 남아서 그것이 다 호흡으로 날아갈때 까지 옆꾸리가 결린다고 합니다. 그 암환자들속에서 내가 제일 싱싱합니다. 별의 별 환자가 다 있습니다. 내가쓰는 병실에 6명이 있는데 치(齒)암 환자 ,흑색종이라고(피부암)환자, 골(骨)암환자 , 그리고 심부전증 (신장투석)환자와 나 심장병 환자 둘 완전히 병들의 정통파 골때리는 병들만 모였습니다. 모두들 식사를 못합니다. 그중에서 내가 밥 제일 잘먹고 제일 잘 움직이고 그렇습니다. 항암 주사 맞는분들은 밥이 모래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맛이 없는데 내가 밥먹는것을 신기하게 모두들 쳐다보고 입맛만 다시고 구경합니다. 특히 신장 투석하시는 분은 밥이 완전히 저염식이라고 반찬에 소금이 하나도 없고 한1cc의 간장이 비닐 봉투에 따라 나오는데 그것을 반찬에 넣어서 비벼서 먹어야 합니다. 정말 밥맛없습니다... 온갖 살아남기위한 자연요법도 쓰시고 요로법이라고 자기가 눈 오줌을 걸려서 마시는 그런 요볍도 쓰시고 살아남기에 눈물겨울 정도로 온갖 비법을 다 쓰면서 생(生)의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 버퉁치면서 살아갑니다.

 

요로법이란 자기가 먹은약의 성분이 몸속에 들어가면 한30%도 효과를 못보고

다 오줌으로 다시 배출됩니다.

그러면 다시 하얀꺼즈을 컵에 놓고 받아둔 자기 오줌을 걸러서 그것을 다시 마십니다.

약을 다시 복용하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환자를 둔 가족들 남편이고 아들이고 아직 보낼수 없음에 너무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그중에도 얼굴에는 늘 화색을 띄고 부지런히 아픔을 가리고 사시는부인도 보았습니다. 병간호 하는일이 보통힘든일이 아닙니다. 이런 암환자들은 옆에서 같이 먹고 자고 해야하는데 보통 어려운일이아닙니다. 남편은 침대에서 자고 자다가 아프다면은 보호자는 쪼그리고 졸다가 다시 아픈 서방을 아직 목숨이 붙어있어 사람이지 솔직히 말하면 벌써 저승에 명부가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마지막끈을 부여잡고 살려볼 노력을 하면서 사는것을 보고는 참 으로 목숨이라는것이 경이롭다는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암환자들과 8일을 같이 입원생활을 했습니다. 밥 잘먹고 시간 나면 샤워하고 그냥 놀고 이러는데 한 일주일 쯤 되가니 슬슬 걱정이되는데 우리 가정이 뭘먹고 어떡게 살아야 할찌가 걱정이 되어서 의사선생님이 회진을 돌때 퇴원을 시켜달라고 했더니 않된다는군요. 아직 위험한데 내가 길을 걷다가도 쓰러질수 있기에 그동안 돈번다고 수고했으니 여기 병원에 휴가왔다고 생각하고 마음편하게 먹고 편히 쉬도록 하라고 합니다. 의사선생은 내게 마음을 안정시킬려고 그런 말씀을 하는데 내가 벌어야 우리집도 먹고 살겠기에 부탁을 계속했더니 그럼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와서 자기에게 검진을 계속받는조건으로 퇴원을 허락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부터 4주를 주마다 와서 진료를 받고 일하고 그렇게 하다가 그다음부터는 2주에 한번씩 한 2달 받고 그다음부터는 한달에 1번씩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진료를 계속했는데 처음에는 술을 끊어야 산다기에 술을 과감하게 끊었습니다. 처음에 몸무게가 딱 8kg이 줄고는 그다음부터는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8kg가 술살이었던것입니다... 그리고 한 3년을 그렇게 주승재박사님과 진료를 했는데 미국에 유학가신분이 돌아오시고 주박사님은 제주의대로 가시고 이곳은 미국에서 오신 차태준이란분이 돌아오셨는데 이제 그분이 나의 주치의가 되신것입니다. 이분은 또 학계에서 알아주는 연구파로 나를 와파린 임상실험에 참여하게 하시어서 2달에 한번 오는 병원을 그때부터 1달에 한번씩 오게 만들었습니다. 한 3년을 임상실험을 했는데 시간관계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지난분기부터 임상이 끝나고 지난번부터 70일씩 약을 끊어서 처방 해주십니다. 저는 심장냇과를 가면 제일먼저 혈액 채취부터 합니다. 그리고 갈때마다 심전도를 찍습니다. 이것을 보고 상태를 판단하니 늘 해야합니다. 오늘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의사를 만나기위한 시간이 준비만 3시간입니다. 이번에 갔더니 한동안 않와서 간호사팀이 다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모르는분들입니다. 저는 직업상 일찍 진료를 보고 일하러 가야 하는데 저를 늦게 시간배정을 잡아서 애로점이 있었습니다. 3시간 기다려서 의사선생을 만나서는 혈액검사결과보고 심전도 보고 하는말이 "괜찮네" 약은 지난번과 같이 합시다 다른 이상은 없지요...이게 끝입니다.

한 1분 걸렸나 모르겠습니다....

허탈합니다. 그리고는 다음에 내 생일날 8월28일날 오라고 합니다.. 생일날 아침 굶고 가서 채혈해야합니다....ㅎㅎㅎ 술을 마시면 다시 심장이 재발 한다고 하니 술은 마실수도 없고 어딜가나 음료수 아니면 맹물 어쪄다가 맥주 한잔이 전부입니다...ㅎㅎ 그러다보니 술친구 다 떨어지고 밖에 나가서 누굴 만나도 별로 흥이 없고 모두 싱겁습니다. 그런데 이 심장병이 병명이 "고혈압에 의한 부정맥과 심방세동"이랍니다. 이 병은 중풍을 일으키는 첫번째의 요인이 되는병이랍니다. 심장이 펌프질이 계속되다가 가늘게 한번씩 떨면서 헛펌프질을 할때 그 피가 심장혈관으로 밀려 가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지는것이 찌꺼기가되어서 다음에 밀려서 올라가면서 그 찌꺼기가 딸려올라가서 뇌혈관같이 가는(미세) 혈관을 막아버려서 피가 흐르지못하고 혈관이 풍선처럼 부풀어져서 터지면은 바로 뇌졸중(중풍)이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혈액을 묽게 만드는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갈때마다 혈액농도 검사를 하는것입니다. 피가 찐하면 묽게하는와파린을 높이고 피가 묽으면 또 지혈이 않되기에 잇몸같은것에 양치시 피가 자주나고 멈추지않기에 농도 조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 병원도 자주 다니니 그만 싫증도나는데 병원가서 보면은 살아있는것에 항상 감사하고 하루 하루 사는것이 보너스 같이 느껴지고 그럽니다. 살아있다는것이 모든 사물을 바라보게되는것에 감사하게 되는것이지요.,. 요즘 일감이 없어서 매일 놀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 집사람은 못벌어도 좋으니 건강만 하라고 합니다. 집안에 아픈사람이 없이 사는것만큼의 행복도 없지요.. 항상 감사하고 특히 우리집사람에게 우리 가족에게 더 감사하고 우리 친구들과 직장동료들에게도 더 감사합니다. 하늘이 맑고 깨끗함에 고맙고 나를 알아봐주시는

모든분들에게도 모두 감사하고 그리 삽니다. 보너스 인생 만세 입니다....

[동아일보]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살짝 도망치세요.” “그렇지만 어떻게…” “모내기철이 다 됐는데 당신이 빨리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가난한 농부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내기철이 됐지만 입원비가 밀려 퇴원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차였다. 성산 장기려 박사가 남긴 일화다. ‘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추앙받던 그가 1995년 12월 25일 눈을 감았다. 북한의 박사 공동 1호(1948년), 한국 최초의 간 대량 절제술 시술(1959년), 국내 최초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보험 도입(1968년) 등 그는 의료사에 큰 획을 그은 의사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된 것은 성공을 마다하고 어려운 환자들과 삶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출세가 보장된 경성의전 교수와 충남도립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거부하고 평양 기홀병원으로 갔다. 수술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피를 사서 수술대에 오르게 하고, 겨울에는 환자들에게 내의를 사 입혔다.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는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킨 일화는 ‘돈 없는’ 환자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런 그는 평생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병원의 사택에서 살았다. 1975년 고신대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도 집이 없어 병원 측이 병원 옥상에 작은 관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재를 털어 무의촌 진료를 다녔고 청십자 의료보험을 도입해 가난한 이들에게 병원 문턱을 낮추기 위해 애썼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은 장 박사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춘원은 장 박사에게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 박사가 가장 후회했던 일은 6·25전쟁으로 남하하면서 북에 아내와 5남매를 두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는 재혼을 권유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결혼은 오직 한 번 하는 것”이라며 독신으로 살았다. 1991년 미국 친지를 통해 아내의 편지와 가족사진을 받았으나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운명했을 때 장 박사의 침대 머리맡에는 젊은 아내의 모습과 훗날에 구한 80대 아내의 모습을 담은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평생 실천하며 살아갔던 그의 비문에는 “주님을 섬기다 가신 분이 여기 잠들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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