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성산(聖山)병원

짬스탑 2009. 6. 19. 12:26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십니다..제가가는병원설립자이십니다.

 

방금 병원에 다녀오는길입니다. 근 70일만에 병원을 가게 되었지요. 젊은 나이에 심장병이라는것을 알게 되어서 그래도 없는집에사는줄 아는지 수술을 할만큼의 중증은 아니고 약만 꾸준히 복용하고 혈액관리를 잘하고 건강체킹만 잘하면 죽지는 않겠다고 이것만 해도 복많이 받은거라 생각하면서 삽니다. 2002년 여름 8월달 어느날에 점심때 라면으로 먹고 오후에 물뜨러 약수터 가는 시장바구니 핸드카를 끌고서 약수터에 물을 뜨러가는데 자꾸 어지럽고 옆꾸리가 결리기에 그 날은 토요일이고 해서 병원도 모두 마치고 했기에 다음날에 병원을 가기로마음을 먹었는데 이상하게 체한것같은 그런 기분에 컨디션이 최악이었습니다. 일요일을 그렇게 집에서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아들 친구집이 동네의원을 하는데 그 의원에가서 이리아파서 왔다고 이야기를 하니 청진기를 가슴에 데어보더니 이상하니 심전도를 하나 찍어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심전도라는 이상한 모눈종이에 그래프가 그려져서 나오는데 이게 아주 변화무쌍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저야 뭐, 아파서 왔으니 당연히 그런줄 알았지만 아들과의친구 아버지인 의사가 깜짝 놀라면서 지금 당장소견서를 써줄테니 이 즉시 다른길로 새지말고 바로 대학병원응급실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저는 병원과는 별로 못친했던 사람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일단 차를 몰고서 근처에 있는 고신 대학병원을 방문했습니다. 몸은 않좋아서 병원을 왔는데 글쎄 안되는놈은 어딜가나 재수가 없습니다. 집이 근처라서 이 병원을 왔는데 마침 간호사들과 병원운영진과 무슨 문제인지 잘 모르겠으나 마침 스트라이크중이라서 장기 파업으로 죽지않을 환자는 모두 다른 병원이나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응급환자만 남기고 모두 강제퇴원시키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이런 사정이다보니 종합병원에 매일 찾아오시는 환자들이 진료가 않되니 원무과앞에서 모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실정인데 내가 도착하니 내앞에 줄이 한 200명은 넘게 있었습니다. 몸은 지금 상태가 나빠서 하늘이 노랗고 빙빙 도는데 빨리 병원수속을 해야하는데 줄이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기다리기가 겁나고 화도 나고 그냥 가버릴까 하다가 기다린시간이 아까워서 계속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한 시간반만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습니다. 일단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면서 접수를 하고 특진을 신청해서 교수를 만났습니다. 진료실에도 많은 환자가 기다리고 있고 옆에 있던 기다리던 사람이 나에게 무엇때문에 종합병원을 왔느냐고 묻습니다. 심장이 안좋다고 의사가 이곳을 가라고 해서 왔다고 하니 자기는 심장 박동조절기를 수술해서 왼쪽 가슴속에 넣었는데 수술비와 기계값까지 약 4천만원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겁이 덜컥 납니다. 이제 겨우 먹고 살려고 조그만 아파트 하나 장만 했는데 벌써 죽을 때가 다되어서 그것도 잘 못하면 수술할것인데 수술하면 겨우 장만한집까지 팔아서 우리집 식구들이 모두 길거리로 나앉을지가 제일 걱정되었습니다. 드디어 한참을 기다리던 내차례가 왔습니다. 의사는 심장에 아주 일각이 있는분으로 내 가슴에 청진기를 데어보고는 깜짝놀라면서 언제부터 이렇게 심장이 두근 거렸냐고 물으시고 급히 전화를 하시더니 바로 침대시트카 가 왔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내가 걸어갈수 있다고 했더니 지금 걸어가다가도 죽을 정도라고 바로 침대위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할수없이 올라가서는 다시 이제 응급실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의사는 없고 모두 실습의사들과 인턴과 그밑의 PK라고 명찰을 붙은 학생들이 와서 나를 자꾸만 물어보고 아버지는 어떠하셨는지 집안에 형님은 어떠하셨는지 자꾸 물어봅니다. 나는 피곤하고 귀찮고 힘든데 말이지요. 이제 응급실 병상에 눕고나니 간호사가 나보고 보호자 불러오라고 합니다. 아들딸 집사람 모두 일하러가고 없는상황인데 나보고 불러오라니 난감합니다. 일단 전화를 해서 집사람은 오라고 해뒀지요. 심장이 너무 빨리뛰어서 좀 천천히 뛰게 하는 약을 하나 링거속에 투입했는데도 여전히 심박수가 160을 상회 합니다. 그래서 약을 하나더 투여해서 2개를 넣고 링거를 맞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70~90이 정상인데 거의 두배를 뛰고있습니다. 교수는 이런상태로 계속가면 길을 걸어가다가도 쓰러져서 죽을수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이런 상황도 모르고 숨쉬기가 어렵다고 하니 폐에 물이 차서 좀더 심하면 맨땅에서 호흡기관에 허파에 물이 생겨서 익사 한다고 합니다... 글이 너무 길다고 하니 오늘은 여기서 짜르고 나머지는 다음날 2편으로 올립시다....^&^



[한겨레] 할아버지 손은 약손/한수연/영언문화사 ... 이글은 네이버에서 가져왔습니다. 우리 겨레의 삶 속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민간 치료법이 많았다. 어린아이가 배가 아프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배를 정성으로 문질러 주면 낫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요즘은 조금만 아파도 어머니의 정성보다는 병원으로 가니까 이런 사랑의 기적을 느끼는 아이들이 많지 않아 아쉽다. 병은 사랑으로 치료하는 것이가장 좋은데, 더러 어머니나 할머니의 약손 같은 사랑이 깃든 손으로 치료하는 의사,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외경심을 갖고 의술을 펼치는 의사들이 있어기쁘다. 이런 사랑의 의술, 사랑의 의사로 불리는 의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분이 장기려 박사다. 장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민족교육을 열심히 했던 의성학교에이어 경성의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1943년 최초로 간암 환자를 수술하여 유명해졌고 1946년 김일성대학 의대 교수로 추천되었으나 사양하다가 교회에 나갈수 있다는 조건을 걸고 교수가 되었다. 1950년 국군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 와서육군병원에 근무하면서 ‘복음병원’이라는 무료 병원을 열었다. 이때부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서 있는 의사, 끊임없이 봉사하는 의사의 길을 걸었다. 부산대와 서울대 의대 교수를 지내면서 우리나라의 첫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청십자병원을 세워 아픈 사람들을 사랑의 손으로 치료했다. 이런 봉사로 크고 작은 상을 많이 받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상은 우리겨레가 그분의 삶을 기억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분과 같은 사랑의 약손으로 사랑의 의술을 펼치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따르는 의사들이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주이야기체가 많고, 주인공 삶이 감동을 주기 때문에 초등학교 4~5학년 정도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1992년 출판된 뒤 잠시 절판되기도 했으나 출판사를 바꿔서 계속 나오고 있고,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입소문이 반갑다. 이 책을 읽은 어린이들이 장기려 박사의 삶을 마음에 담고, 조금이라도 사랑의 약손을 기억하면 좋겠다. 이주영/서울 송파초등학교 교사 jyl0301@hanaf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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