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결혼기념일 .

짬스탑 2011. 12. 6. 17:38

 


아들이 열세살되던 해 였던가보다.
어느새 세월은 흘러서 벌써 아들이 결혼해서 2년이 넘어 손녀를 낳고 사는데
나는 아직도 결혼할 그때의 그 기분그대로 살아간다 
결혼할 당시 그해의 오늘은 몹시도 추웠다.
아직 모든것이 자리잡기도 어려웠던시절에 집사람과 나는 어린나이에 만나서 
지금말로하는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는 어머니함께 산동네 어머니집에서 둘이 같이 지냈는데 방도 비좁고 
나는 18살에 집사람은 19살에 만나 살다보니 어린 청소년이 어느덧 아이가 생기고 
하다보니 이제는 어머니밑에 있기가 불편해서 정말로 없는 살림이지만 
분가를 해야했습니다.
그렇게 갓태어난 아들과 함께 한2년을 어머니집에서 지내다가 3년이 되는해에 
분가를 하는데 집사람이 다니던회사에서 퇴직금으로 그당시 돈으로 30만원을 
받아있었는데 10만원에 월2만원짜리 월세를 얻어서 독립했습니다.
이불하나와 수저 2벌을 챙겨주시더군요.
그리고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에 어떤 두려움도 모르고 
우리 부부는 그냥 앞만보고 그냥 살았습니다.
나역시 아직 세상의 경험도 부족하고 집사람역시 아이들 키우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세월은 흘러서 없는 살림에도 무사히 아이들 학교 보내고 또 학원을 보내면서 
아이들이 커가는것을 보면서 금전적으로는 거의 무일푼으로 살았습니다.
그당시에는 또 내가 돈을 조금씩 만지기 시작하던때이라서 집사람은 조금 돈이 생기면 
방을 큰집으로 조금씩 옮기며 이사를 해서 전세금을 키우며살았습니다.
그런시절에 일을 하다보니  나보다 나이가 좀더 있는분들이 도박을 하자고 해서 
할줄도 모르면서 기죽기 싫어서 그런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무서운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수년동안 넣어둔 적금 통장만 믿고 또 하고 또하고 그렇게 중도 해지한 
적금통장이 여닐곱개는 되지싶습니다.
어느덧 나도 나이가 30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못했지요.
열심히 살면 돈이 모아지면서 살림도 불어나고 좀더 좋은 환경으로 가야하는데 
나이가 어려서 독립을 하다보니 누군가가 옆에서 컨트롤 해줘야하는데 
경험이 없는 세상을 배울려니 혹독한 교육을 받습니다.
조금 모아놓으면 또꾀임에 빠져날리고 그냥 되는대로 세상을 살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람이 알뜰해서 조금씩 모은돈으로 월세방에서 전세로 나가고 
전세에서도 좀더 큰 방을 찾아서 나가게 되었고 
이제는 아들과 딸이 다 학교를 다니게되는 학부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이제 아이라는끈으로 처가와 왕래도 좀 하게되었습니다.
그렇게 완고하신 징인어른도 결국에는 자식에게는 이기시지못하셨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처가나 우리나 찢어지게 가난해서 뭘 바라고 서로 위해줄 형편도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인이 모든것을 아이들때문에 이해를 해주시고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결혼식을 자기 살아있을때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말씀을 하십니다.
결혼식이라야 뭐 젊고 마음이 끌릴것이 없던나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않았지만..
장인과 장모님은 마음이 아프셨던것같습니다.
큰딸이 가출해서 웬 거지같은놈과 함께 살림을 차려서 아이까지 낳고 사는데 
동네사람들 보기 민망도하고 하니 이왕 사는것같으면 정식으로 혼례식을올리고
부모로서 도리를 하고 싶었는데 장인어른역시 가진것이 없다보니 
당신이 못해주는것에 많이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던 1991년10월 어느날 장인께서 우리집에 우리사는것을 보러오시면서 
결혼식할때 예물이라도 사라고 하시면서 그당시돈으로 1백만원을 주시는군요.
저는 이런것 없이도 결혼식이 가능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
자네 형편이나 우리형편이나 다 그렇고 그런줄아는데
그냥 예물시계나 하나 사고 여행다녀오는 경비에 보태쓰라고 하시면서 
억지로 돈을 건내주십니다.
솔직히 지금와서 말을 하자면 그돈 1백만원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장인어르신의 마음이 꼭 경비를 보태야하겠다는 마음이라서 하는수없이 받았습니다.
우리부부는 지금도 집에있는 손목시계를 세트로 구입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더 크기전에 부랴부랴 예식을 올리려고 근처에 예식장을 알아보니 
우리 옆집에 딸친구네 박선장님이라고 하시는분이 아주 잘 사시는데 
그 집의 사모님이 그런말을 듣고 어떤예식장을 추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길 ..
자기네 시동생도 어떤 사진관 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는데 경비도 저렴하고 
지금은 아주 잘사는부자가 되었다고 그곳에서 결혼하면 앞으로 
아주 부자가 된다고 하시면서 예식장을 권하시는겁니다. 
그분의 시동생은 지금도 말만 하면 다 알아주는 일류만화가 이제는 작고 하셨지만 
"신이라고 불리운사나이"를 만드신 박봉성이란분이었습니다.
그외에 "나는 왕이로소이다"등 등 수많은 만화 히트 대작을 만드신분인데
젊은 나이에는 그림만 그리다가 할게 없어서 수입이 없어서 여자분들 한복에 
치마에난초 그림같은것을 쳐서 부업을 하면서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내시다
만화가 히트를 쳐서 인생이 바뀌신분이지요.
그 분이 그런 사진관예식장에서 가족들 모시고 조촐하게 결혼사진만 촬영하고 
집에서 그냥 식사나 하는정도의 결혼을 하셨는데 경비가 근 1백만원도 안났다고 
하시면서 우리도 형편에 맞게 그렇게 하면좋겠다고 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자되셨다는 그말에 믿지는 않으면서도 경비도 아끼고 사진도 
찍고 결혼식도 할수있을수 있다기에 그곳으로 정했습니다.
장소는 부산의 초장동 한전바로 뒤의 충무사진관예식장에서 말입니다.
지금은 그냥 사진관으로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결혼식을 하게되었는데 우리형님네가 양복을 한벌 맞춰줘서 
그것으로 예복을 대신하고 가족과 친구 몇명만 초대를 했습니다.
그당시에도 나는 운수업을 하고 있었지만 별로 돈을 잘벌지도 못했고 
친구들도 많이 없었고 학교는 다니다가 말아버려서 동기도 없고 그야말로
거의 고아가 결혼하는수준으로 단촐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위에 사진에 있는분들이 친구들이 모두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결혼식을 마치고 그냥 집에 갈려니 하객들이 
그냥 온천장이나 가서 하루 지내고 집에 오라고하는군요.
그래서 결국 동래온천장에가서 녹원탕이라고 유명한 온천여관에서 
억지로 하룻밤을 둘이서 보내고왔지요.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그렇게 보내고 다음날 바로 집으로 아이들때문에 왔습니다.
그러부터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결혼 기념일을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어제 저녁에 일하다가 돈이 좀 필요해서 갑자기 은행을 가게되어서 약간의 경비를 
인출했는데 기계에서 서태호님의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라구요 
그리고 오늘은 결혼기념이라서 수수료는 받지않습니다라고 그런내용의 메모가뜹니다.
세상 참 나도 잊고 살았는데 결혼기념일을 인식시켜주는군요..
집사람에게 오늘은 작업이 늦다고 전화를하고 오늘 은행기계가 결혼기념일이라고
알려주는데 달리 이벤트 같은것을 해줄것이 없고 먹고싶은것이 있는가 하고 물어봤더니 
그냥 되었다고 말만하는군요..
세상 참 잊고 살다가 이런것을 갑자기 알게되니 뒤통수를 한방맞은것같이 띵합니다.
결혼 기념일 벌써 한20년도 넘었군요..
그런것 생각해보면서 산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참 무심한 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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