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밤이면 겉이불이라도 한장 덮고자야하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아직 한낮은 햇살이 강열해서 곡식이나 과일이 익어가기에는 좋겠지만 어느덧 올것같지않던 가을이 성큼다가온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달동안 아들의 직장관계로 이사를 해야하는데 이사를 뭐 달랑 몸만가지고는 할수없는것아닙니까.. 이사란 첫째로 가야할 집이 있어야하고 둘째로 입지조건과 돈이 있어야하는데 뭐, 하나 제대로 가진것없습니다. 우리 아들 이번에 직장을 사천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근 6년을 제대로 다닌직장에서 나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그냥 옮기게된다고 하면서 근 6개월을 집에서 쉬게되었습니다. 원체 자기 앞가림정도는 사고없이 처리하는성격이라서 우리가 입을 뗄 정도는 아니였고 그냥 두고만보았습니다. 부산의 회사에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 시험을 보러 처음에는 김해 생림(상동)쪽에 있는 엘레베이터 문을 만드는스테인레스 철판에 각가지의 문양을 만드는 회사라고 갔는데 면접시험 보러 가는데만 차를 한4번갈아타고 택시타고해서 갔더니 .. 웬 산골짝에 있는 작은 중소기업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차가 없으면 부산에서 출퇴근이 안되는곳이라서 도저히 갈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면접본다고 집에서 근 일주일이상 쉬면서 준비를 하던데 .. 아버지인 내가 보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2달이 다되가도록 입사가 한되니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대학나와도 I,M,F의 끝자락의 여파로 요즘도 그렇지만 대학나와도 취직못하는 사람들이 넘칠때였습니다. 친구들은 안산이니 시흥이니 서울이나 경기도 쪽에 직장이 많다고 다들 올라가는데 는 나는 아들을 말렸습니다. 경기도나 지방가서 년봉 3천받으나 부산에서 2천받는것이 더 알지고 낫다고 지방을 못가게했습니다. 지방에 나가서 혼자생활해봐야 술이나 마시고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어떤길로 어떻게 빠질지 몰라서 내가 반대한것입니다. 그러던중에 부산 녹산공단에 있는 항공부품회사에서 서류를 넣었는데 전화가와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했다고 합니다. 면접번호가 한70여번 되었는데 신규채용은 특채가 두명이고 두명을 뽑는데 아들이 일단은 1차는 합격을 하고 2차로 가서 사장과 다른관리자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아서 100명 응시자중에 4명뽑는 신입사원면접에 합격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접수를 많이 하니 보통 접수만 넣어놓고 안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백명중에 한50명정도 왔겠지요. 그렇게 힘들게 취업을 하니 아버지로서도 참 기쁘고 좋았습니다. 아들을 둔 보람도 있고 이제는 자기밥벌이는 할수있겠구나 하고 가슴이 뿌듯햇습니다. 그로부터 아들은 수난의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디 어느곳이 돈을 수월하게 주겠습니까.. 일단 취직해서부터 일이 많아서 집에 오는시간이 부담이 되는 거리이다보니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침부터 매일 밤10시까지 근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기를 3년을 했습니다. 토요일 저녁이면 빨래감을 한가방 메고 집으로돌아와서 일요일 좀 자고 다시 월요일 출근하는그런방식으로 3년을 버틴것입니다. 입사동기들은 다 일이 힘들어서 나가고 결국 아들과 한명이 남아서 둘만 남아합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나고 드디어 대리로 진급하던날 이제부터는 회사에서 직원용 주유카드가 나와서 집에서 매일 차를 몰고 출근할수있는 권리를 얻어서 집으로 오는데 그래도 집에 오면 늘 9시였습니다.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청년기를 다 바친 회사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만 두게되었을적에 회사사장과의 면담이 있었는데 수고했다는 말한마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사에 비애감을 느꼈다고 합니다.그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6개월쉬고 이제 사천에 새직장을 잡은것같습니다. 아들역시 아는것은 항공쪽뿐이니 사천에 항공산업단지가 있다보니 결국 그쪽에 가게되었나봅니다. 일단 이사는 할려니 집을 사야할것인가 아니면 전세를 얻어야할것인가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부산집을 처분해야하나 전세를 주고 가야하나하고또 고민하고 말입니다. 아들집을 처음장만하는것도 내가 아들을 결혼시키기위한 하나의 수순으로 집을 장만했습니다. 내가 전액을 집사람과 힘을 모아서 대금을 치룰수가 있었지만 아들에게 책임감과 자기명의로 된재산을 만들어보라는의미에서 일부 아들에게 은행을 대출받아서 납부케했습니다. 아들이 적은 월급타서 담배도 마음대로 못사피우고 술도 제대로 못마시고 월급을 거의 적금에 부어서 이집을 마련하게된것입니다.
30살정도의 청년이 좀 헐값이래도 자기명의 35평형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일도 그리흔한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힘들게 저축을 했으니 오늘날에 이렇게 괜찮은 메이커 아파트도 소유하게되는것이지요. 우리 아들 힘들게 컸습니다. 부모가 다같이 나이가 어려서 만나서 아들에게는 그리 신경을 쓰지를 못했습니다. 남자20살때 아이 귀여운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올바른 직업없이 아이만을 가지고 우리부부둘이는 그냥 부지런히 하면뭐든지 되는줄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어느날 국토방위의 임무를 받고 군에 가게됩니다. 그러다보니 집안의 생계가 막막해지더군요. 그동안 내가 일해서 한달 한달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날 날아온 입영영장이 집사람을 생계비를 책임지는 일자리로 내몰고 아이는 겨우 5살인데 천방지축으로 뛰어노는데 문제는 아이들 챙기고 거둬줄사람이 없다는것입니다. 감천 꼭대기 동네에서 조금만 밑으로 가면 큰길에 차가 다니고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고 밥도 혼자서는 챙겨먹을 정도가 안되니 더 문제였습니다. 오후 6시가 넘으면 내가 방위근무마치고 일찍집으로 바로 뛰어오고하지만 그래도 집사람이 한푼벌어서 생계에 보탬이 되려고 화장품외판원을 했습니다. 집사람도 일을 집근처에서 한다지만 아이걱정에 정말 눈물겹도록 어려운시절을 한 1년이상 보냈습니다. 아들은 어쩌다가 내가 일찍오거나 놀고있을때 보면 다른 부모들이 챙겨주는 아이들과는 사뭇 다르게 놀고 그렇게 시커멓게 얼룩이 묻어도 누가 닦아주는 사람도 없이 놀면서 옆집아주머니가 끼니가 되면 챙겨주는것에 우리가족 모두가 가슴아파했습니다. 요즘같으면 형편이 되든 안되든간에 학원이나 유아원을 보냈을것인데 그 당시에는 너무 없어서 그렇게 힘든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가슴아픈 사연이 있었기에 이제라도 잘해줄려고 노력하는것이지요. 이제는 그런 시절이 다 흘러가고 그 아이도 자식을 낳아서 이제 사천으로 좋은 아파트를 사서 지난주에 이사를 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집을 수리하고 이런 주택같은 큰 계약도 해보고 이런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모든것을 다처리할수있는 성인으로 거듭 태어난것에 부모로서 감사하고 정말 행복하고 자식에게는 어려움을 주지않는 훌륭한 부모로 살아가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힘든시간은 여기까지 입니다. 이제 추석이 다가옵니다 아들도 주택문제와 자녀문제 잘되고 딸도 임신소식이 드리는 이번 추석에는 집안이 더 잘될것같은 느낌이 오는 그런 한가위 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추석에 복많이 받으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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