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에 젖어..

2010. 5. 24. 22:15좋은시와그림.

이 글은 제가 잘아는 수필가이시며 원자력연구소의 시설팀장을역임하고 계시는
조성원박사님의 수필글로서 제가 마음에 들어서 한자 빌려왔습니다.

비가 너무 자주 내려서  문득 여기에 맞는글이있어서 소개합니다.

(글 옮기는것을 금합니다.)x..저작권에 문제있음.....x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고 눈 오고 춥고 덥고... 매일 달라지는 하늘의 주문이다. 매일 맑은 날 없으며 늘 궂으란 법 없다. 무릇 삶 자체가 그러하다. 술을 좋아해서인지 비를 연상하면 꼭 술이 달라붙는다. 그렇다고 비 올 때만 술 생각이 나는 것은 아니다. 맑은 날은 훤한 달밤에 된장 찍은 풋고추에 동동주면 제격일 것 같고 흐린 날은 촛불 켜 논 아늑한 방에 조용히 앉아 달작지근한 포도주에 음울한 상송이라면 어떨까. 추운 날은 동태 국물에 소주 한 잔. 더운 날은 냉방에 걸터앉아 바삭한 통닭에 거품 풀풀 이는 생맥주, 눈 오는 날은 창밖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앉아 훈제 오리고기에 독한 보드카 한 잔이 그럴듯하지 않을까. 시시때때 수시로 변하는 마음, 솔직히 비 오는 날은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술은 이미 정하여져 있다. 문제는 안주다. 가랑비 정도라면 안주꺼리가 마른 멸치 몇 개에 두부김치정도라도 과하다 싶고 장대비라 하면 퍼붓는 난폭이 내 마음 같아서인지 여간한 것으론 성이 안찬다. 순대국물에 진한 개장국이 언뜻 떠오른다. 여느 비는 갖은 궁상에 추레함을 타고 이런저런 애상이 떠오르건만 허나 장맛비는 지루함에 탈진이라도 된 것인지 아무런 추상이 없다. 전혀 술 생각이 안 난다. 갖은 짜증 다 모아 홧김에 마시는 김치 쪼가리에 홧술이란 느낌 외엔 아무런 감흥이 없다. 물러서지 않은 채 웅크리고 앉아 시시때때 심술을 부리며 대작을 하자 하니 질리고 만다. 장마는 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 아니 이미 물 건너 가 버린 정감이다. 대결을 의미한다. 궂은 날 싸움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가랑비가 얄팍한 젊은 부부 티격태격하는 싸움을 생각나게 하고 장대비가 칼로 물 베기의 부부싸움의 정수라 한다면 장맛비는 법원 앞에 죽치고 앉아선 이혼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끝장을 보자는 것이다. 도장을 찍자고 한사코 떼를 쓴다. 그렇게 늘 당하여 온 장마다.

 

 

 

그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는 단연 보슬비다. 물론 단아하고 정갈하여 이슬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너무 단출하여 낭만 없는 쓸쓸함을 느낀다. 안개비 또한 기묘한 느낌이 희뿌연 여인의 허벅지 같은 야릇함이 들지만 이젠 더 이상 허하지 않다 여겨서인지 아니면 허하여 어쩔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인지 별 매료됨이 없다. 보슬비 내리는 밤엔 가만 창밖만을 바라만 보아도 술을 마시는 듯 얼큰해진다. 그런 날엔 한 푼짜리 서정이 뚝뚝 사정없이 가슴에 닿는다. 흔해빠진 비라서 그러한지 서민적이고 청승맞은 애환이 저미듯 스미는 것이다. 그러한 때 나는 보슬보슬 비에 젖어 추적거리며 흠씬 취한 듯 웬 모를 정염으로 글을 쓴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 이런 날이면 나는 왠지 모르게 홍역 걸린 아가의 벌건 얼굴이다. 천진스레 아픔을 한 몸에 담고 싶은 게다. 아마 젊은 나이라면 무작정 그 비 흠뻑 맞으며 그동안의 무표정했던 마음들을 서글픈 감흥으로 모두 지우려 했을지 모른다. 서푼 낡은 회색빛 을 글로서 남긴다는 누구는 인사동 빈대떡집에 들러 낮술 한잔 진하게 걸치려 하겠지만 벌건 대낮 대담하지 못한 주변머리에 월급쟁이 살뜰함으로 호박 숭숭 썰어 넣은 수제비 아니면 부침에 젖은 옷을 말리려 했을 것이다. 왜들 이런 날엔 국수나 수제비 생각이 우선하는 걸까. 뜨끈한 국물에 울적한 마음이 뽀송뽀송 해지면 백수건달이 되어버린 누구는 천호동에 들러 죽여주는 색소폰 연주에 맞춰 삼류의 처량함으로 한 곡 당기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들려오는 것만 같다. 가방을 든 여인... 그 통속적인 처참한 유혹을 부르는 색소폰 소리. 하지만 씻긴 마음에 정갈한 교양이 탐이 난다면 그 때 만큼은 경복궁근처 JUN에 들러 진한 허줄 넷 향에 취해 LE PROMIER PAS 기타연주곡을 유식한 척 듣는 건 어떨까. 하지만 그 노랠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빛바랜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할 것이다. 그 나이 첫 발자국 그 청순함으로 다시 돌아서기를 바라는가. 어둑한 거리엔 네온만이 따로 노는 얼룩진 표정이 채근된다. 시류에 맞춰 잘 나가는 호인은 태평하게 을지로 한 켠 한정식 집에 친구 여럿 불러내 때늦은 호기도 부리겠지만 모처럼 무작정 나선 길, 배고팠던 그 시절처럼 동대문 뒤 어느 뒷골목 짐꾼들 틈에 끼어 라면국물에 소주를 연거푸 마셔보는 것은 어떨까. 빈부가 교차되는 그런 길목에 서면 나는 왠지 모르게 부는 마냥 미워지고 빈에 대해선 적개심이 생기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허무감의 비애로서 소주를 마셔야 중화가 된다고 믿고 만다. 그렇게 빈속에 채워진 독주는 본능적 욕구를 쉽게 잉태하는 건 왜 아닐까. 아마 돈푼 꽤나 만진다는 반지르르한 이 세상 누구는 강남 어느 외래간판을 찾을지 모르지만 동전 한 닢으로 반주가 틀어지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조용필의 돌아오지 않는 강을 진한 호소력으로 한번 불러보는 것도 괜찮다. 이 날씨 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너무도 청승맞은 위험한 노출이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지만. 때론 허욕의 낭만보단 참혹한 고독이 더 값질 수 있다. 그 시각 꾸역꾸역 자기 닮은 외로움이 보고 싶다든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본능회귀가 감싸진다면 단돈 만 냥에 테이블이 해결된다는 서울 변두리나 대전 태평동 근처 가까운 카네기 사롱은 또 어떠할까? 카네기 사롱은 유성에 잘 나가는 나이트클럽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염의 고비에 선 시들한 중년들이 얼굴 감추고 가는 곳이다. 나 같은 사람한텐 이런 때 안성맞춤이라 할 것이다. 제 아무리 넥타이를 곱게 챙겨 목젖을 감아도 맨살을 휘어 감듯 보슬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이 시각엔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외로움을 참아내지 못한다. 신나게 무대에서 흔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아줌마들이 삶의 여울로 요염하게 보인다. 나갈 때 2천 원씩 웨이터에게 팁을 받는 그 뒷모습이 흡사 보슬비를 닮은 것도 같다. 그 모두가 여남은 교태 그 정염의 절정인지도 모른다. 누구인들 남은 허욕의 시간을 알까. 물론 70년대 젊은 청춘시절 곡이 때 모르고 철없이 흘러나온다던 그곳, 전등이 반쯤 닳아버려 노래가 저절로 쇳소리가 된다는 안양 어느 동네의 구성진 카페가 더욱 세차게 밀려오는 밤비엔 제격일지 모른다. 허나 이도 저도 아닌 바엔 세월의 처량함으로 보슬비를 마음속에 듣는 것도 괜찮다. 양철지붕아래 우두둑 떨어지는 빗소릴 세속의 몰염치로 받아 적으며 빈속에 거푸 마셔대는 객기는 그쯤 용맹이 될 수도 있다. 이 정도면 홍역한번 되게 걸린 격이라 그 누가 나보다 더 섧고 고독하다 할 것인가. 보슬비 따라 추적대며 무작정 떠나는 마음 마냥 가냘파지는 이 계절에... 난 안양 그 소읍을 방황하고 그렇게 또 걷고 있다. (조성원님의 수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