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보니 이런날도 오는가봅니다. 얼굴이 못먹어서 얼굴에 버짐이있고 노랗고 눈만 빤짝반짝거리던 17살 짜리 소년이 어느덧 이제는 한국나이로 50년을 맞았고 서양나이로는 만49년을 막 넘기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살다보니 어려움도 많았고 힘든날도 많았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받지못하고 문교부의 혜택도 짧고 가방끈도 짧은체로 이세상에 나와서 어엿한 가정을 꾸리고 어느덧 우리아들이 결혼을 한다는지경에 까지 왔습니다. 제게 갑자기 찾아온 심장병 큰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머리를 가우뚱 거리는 상황에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서 의사가 놀래고 학생들에게 "이 환자는 처음에는 별로 않되겠구나"싶었던 환자가 엊그제로 병원을 만으로만 7년을 다니고 몸이 좋아져서 이제부터는 3개월에 한번씩 약을 타러오라고 처방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중풍에 결리셔서 집안에 조금있던 가산을 모두 병구완으로 탕진하고 그야말로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었던 집안에서 5형제중에13살의 넷째아들은 가족의 조그만 생계에 도움이되고 가족을 돕는다는 일념에 일이 어려운줄도 모르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위로는 큰형님이 있었는데 그당시에는 가출을 해서 버스조수를 하고 있던것을 수정동 옛동아중학교 앞에 (지금의부산일보 사옥앞)61번버스를 기다리면 어쩌다가볼수있었습니다. 그뒤 자갈치의 어디에서 트럭 조수를 한다는소리는 들었지만 벌써 집안의 가세는 기울어 걷잡을수 없는 형편으로 나의기억으로는 한번도 편하고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던것같습니다. 늘 종이봉투에 되밖쌀을 팔아서 연명했고 그런가운데 누나도 학업포기하고 나역시도 학업을 포기해야했고 조그만 금방 세공일을 배우며 가정에 보탬이 되려했습니다. 어느덧 아버지는 한 3년넘게 병마에 시달려서 돈이 떨어지니 결국 더이상 의 진전을 보시지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결국 돈이 없어서 적십자사의 도움을 받아서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당시에는 뭐 이리구차하게 살아야하나 이것이 인생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더우기 내가 직장생활을 하지않고 공부를 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그당시에는 다만 우리 가족은 같이 살아야한다고 하는그런생각에 돈을 벌면 공부는 생각도 못하고 결국 사람이 최악의 조건속에서 살수있을만큼의 조건으로 살아야했습니다. 그때는 내일의 먹을 양식만 있어도 마음이 포근하던 힘든 시절이었지요. 여기서 내 어려웠던 어린날의 다 이야기할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렵게 살았다는것을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다들 어렵게 살았다지만 더욱 아버지가 이북에서 피난내려오신 월남가족이라서 이쪽동네에는 전혀 기반이 없고 아는분들이 전무한 상태라서 아버지의 친척이 몇분 계신것으로 아는데 우리가 못사니 우리가 오는것을 싫어하신것같고 그래서 더 왕래가 없었고 마지막에는 끊어지게된것같습니다. 내가 아버지 이북에서 피난오셔서 부산에서 어머님을 만나서 그런대로 살림을 꾸리시면서 재미있게 살았는데 우리둘째형이 나면서 눈이 이상이 생겨서 그 당시에 작은병원과 큰병원을 거쳐서 부산대학병원까지 가셔서 수술도 해보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바람에 우리부모님들도 그만 돈과 둘째형 눈(眼) 때문에 전재산을 다 쓰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네 가난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나이였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헤어지는것이 싫어서 가족간에 서로 힘이되어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살았건만 어린시절에 기억에는 한번도 즐거웠던 날이 없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서면에 잠시 살았는데 대한극장옆에 부산우유대리점을 아버지가 여실때가 우리가족 나어릴때의 최고 행복했던 시절같습니다.
이제는 나도 가정을 꾸리고 어느날인가부터 아이들이 다 크고 자기네들도 적게벌으나 따나 돈을 벌면서 가족들의 대소사를 챙겨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우리아들과 딸을 낳고나서 아이들 생일만은 꼭 챙겨서 동네학교 꼬마친구들을 불러서 통닭도 튀겨주고 생일케익에 작은 선물도 해주고 그리살았습니다. 정작 저는 우리집사람 생일과 내생일에는 서로 챙겨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 바쁘고 서로 먹고 살기바빳고 또 어른들이었기에 조건 소원했던좀도 있을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집사람의 생일을 늘 챙겨주려고 신경은 씁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그런 이벤트는 못해주고 그냥 집에서 찹쌀이라도 한되 사다가 찰밥에 소고기 미역국정도로 하면서 생일 축하한다고 하는 따뜻한 말한마디가 서로를 위하는것입니다. 마음은 늘 16살때 사회에 처음 나온것같이 눈만 빤짝거리고 늘 뭔가 하려는 의욕은 강한데 이제 그 소년은 없고 머리는 벗겨지고 배는 나오고 짜리몽퉁한 그런 중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의사가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벌써 축복을 받아서 7년을 지나고 8년을 향해서 건강을 다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딸애가 없을때 딸애가 사다놓은 헬스용 자전거를 시간이나면 한 30분씩 타고 운동을 합니다. 이제는 더욱 건강을 생각하는나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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