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생일 .

짬스탑 2009. 8. 27. 17:30

 

 

사람이 살다보니 이런날도 오는가봅니다. 얼굴이 못먹어서 얼굴에 버짐이있고 노랗고 눈만 빤짝반짝거리던 17살 짜리 소년이 어느덧 이제는 한국나이로 50년을 맞았고 서양나이로는 만49년을 막 넘기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살다보니 어려움도 많았고 힘든날도 많았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받지못하고 문교부의 혜택도 짧고 가방끈도 짧은체로 이세상에 나와서 어엿한 가정을 꾸리고 어느덧 우리아들이 결혼을 한다는지경에 까지 왔습니다. 제게 갑자기 찾아온 심장병 큰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머리를 가우뚱 거리는 상황에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서 의사가 놀래고 학생들에게 "이 환자는 처음에는 별로 않되겠구나"싶었던 환자가 엊그제로 병원을 만으로만 7년을 다니고 몸이 좋아져서 이제부터는 3개월에 한번씩 약을 타러오라고 처방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중풍에 결리셔서 집안에 조금있던 가산을 모두 병구완으로 탕진하고 그야말로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었던 집안에서 5형제중에13살의 넷째아들은 가족의 조그만 생계에 도움이되고 가족을 돕는다는 일념에 일이 어려운줄도 모르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위로는 큰형님이 있었는데 그당시에는 가출을 해서 버스조수를 하고 있던것을 수정동 옛동아중학교 앞에 (지금의부산일보 사옥앞)61번버스를 기다리면 어쩌다가볼수있었습니다. 그뒤 자갈치의 어디에서 트럭 조수를 한다는소리는 들었지만 벌써 집안의 가세는 기울어 걷잡을수 없는 형편으로 나의기억으로는 한번도 편하고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던것같습니다. 늘 종이봉투에 되밖쌀을 팔아서 연명했고 그런가운데 누나도 학업포기하고 나역시도 학업을 포기해야했고 조그만 금방 세공일을 배우며 가정에 보탬이 되려했습니다. 어느덧 아버지는 한 3년넘게 병마에 시달려서 돈이 떨어지니 결국 더이상 의 진전을 보시지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결국 돈이 없어서 적십자사의 도움을 받아서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당시에는 뭐 이리구차하게 살아야하나 이것이 인생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더우기 내가 직장생활을 하지않고 공부를 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그당시에는 다만 우리 가족은 같이 살아야한다고 하는그런생각에 돈을 벌면 공부는 생각도 못하고 결국 사람이 최악의 조건속에서 살수있을만큼의 조건으로 살아야했습니다. 그때는 내일의 먹을 양식만 있어도 마음이 포근하던 힘든 시절이었지요. 여기서 내 어려웠던 어린날의 다 이야기할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렵게 살았다는것을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다들 어렵게 살았다지만 더욱 아버지가 이북에서 피난내려오신 월남가족이라서 이쪽동네에는 전혀 기반이 없고 아는분들이 전무한 상태라서 아버지의 친척이 몇분 계신것으로 아는데 우리가 못사니 우리가 오는것을 싫어하신것같고 그래서 더 왕래가 없었고 마지막에는 끊어지게된것같습니다. 내가 아버지 이북에서 피난오셔서 부산에서 어머님을 만나서 그런대로 살림을 꾸리시면서 재미있게 살았는데 우리둘째형이 나면서 눈이 이상이 생겨서 그 당시에 작은병원과 큰병원을 거쳐서 부산대학병원까지 가셔서 수술도 해보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바람에 우리부모님들도 그만 돈과 둘째형 눈(眼) 때문에 전재산을 다 쓰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네 가난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나이였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헤어지는것이 싫어서 가족간에 서로 힘이되어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살았건만 어린시절에 기억에는 한번도 즐거웠던 날이 없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서면에 잠시 살았는데 대한극장옆에 부산우유대리점을 아버지가 여실때가 우리가족 나어릴때의 최고 행복했던 시절같습니다.

 

이제는 나도 가정을 꾸리고 어느날인가부터 아이들이 다 크고 자기네들도 적게벌으나 따나 돈을 벌면서 가족들의 대소사를 챙겨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우리아들과 딸을 낳고나서 아이들 생일만은 꼭 챙겨서 동네학교 꼬마친구들을 불러서 통닭도 튀겨주고 생일케익에 작은 선물도 해주고 그리살았습니다. 정작 저는 우리집사람 생일과 내생일에는 서로 챙겨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 바쁘고 서로 먹고 살기바빳고 또 어른들이었기에 조건 소원했던좀도 있을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집사람의 생일을 늘 챙겨주려고 신경은 씁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그런 이벤트는 못해주고 그냥 집에서 찹쌀이라도 한되 사다가 찰밥에 소고기 미역국정도로 하면서 생일 축하한다고 하는 따뜻한 말한마디가 서로를 위하는것입니다. 마음은 늘 16살때 사회에 처음 나온것같이 눈만 빤짝거리고 늘 뭔가 하려는 의욕은 강한데 이제 그 소년은 없고 머리는 벗겨지고 배는 나오고 짜리몽퉁한 그런 중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의사가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벌써 축복을 받아서 7년을 지나고 8년을 향해서 건강을 다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딸애가 없을때 딸애가 사다놓은 헬스용 자전거를 시간이나면 한 30분씩 타고 운동을 합니다. 이제는 더욱 건강을 생각하는나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나던해는 음력 윤달이 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윤유월이었겠지요. 생일이 윤유월 5일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내 생일이 양력으로는 8월28일입니다. 우리집 식구들 생일을 내가 관리를 하는데 아이들과 나는 무조건 양력을 지냅니다. 왜냐하면 음력은 달력보기도 어렵고 이것저것따지다보니 생일이 윤달에 끼면 찾아먹기도 힘든것입니다. 그냥 살기도 바쁜놈이 생일은 무슨생일입니까.... 엄마가 생각나는 생일이지요. 평생 살면서 호강도 한번 못해보고 가신 우리엄마 정말 타박네 노래같습니다.... 우리 아버지 가족들을 잘 살려보겠다고 무지 노력했건만 이북에서 오셔서 밑바탕이 없는데다가 아이들이 몸이 않좋아서 돈을 모두 써버렸으니 돈을 벌 힘이 나지않아서 거의 타락하실정도로 까지 가신것으로 압니다. 어머님이 아버지를 찾으시러 좌천동 매축지라는 동네에 나를 걸리고 동생은 업고가서 아버지를 찾으러가셨다가 투전판에서 찾으셨는데 엄마가 주먹으로 엄청나게 맞고 오는 모습이 지금도 내기억에 선합니다. 그런 어린시절에 생일이 있을리가 없지요. 그냥 밥이나 한끼 잘 얻어먹으면 그게 생일인것이지요. 그냥 국수나 한그릇 따뜻하게 말아서 양념간장에 간을 해서 먹고 무병장수하기를 빌던 그런 생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집에 경사가났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오게되었습니다. 가족간의 화합과 우애는 집안의 작은일이나 큰일이라도 모두 모여서 그것을 서로 나누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기쁨은 서로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서로나누면 가벼워집니다. 우리큰형이 산동네에 살때 내일 양식도 없던 시절에 내생일에 미역국 끓여준다고 미역사러 가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그래도 동생 생일이라고 미역을 사러 산동네에서 아랫동네 마을 까지 내려갔다오는게 보통일이 아니것만 그래도 동생의 생일을 챙겨주었던 형님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집에서 우리집사람만 유독 혼자서 음력으로 생일을 챙깁니다. 내가 주민등록상의 양력으로 하라고 하니 자기의 뜻에따라서 음력으로 지냅니다. 누구나 태어난 생일은 있습니다. 누구나 축복많이 받아야하는날입니다. 이좋은 세상에 축복받아태어났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생일날은 축하를 해주는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엄마 힘들게 살다가 힘들게 가신엄마 생각에 더욱 간절해져서 이 글을 쓰는순간에도 눈물이 맺힐려고 합니다. 한번도 살기좋은 세상을 사시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게만 사신분 ... 이제 내일이면 나의 생일인데 내가 안계시는 우리엄마한테 무엇을 드리면 좋아하실까요. 힘들게 살아온 나의 50년입니다. 남들앞에 이제는 성공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남들에게 신세지면서 살지않고 스스로 일어서서 지금 당당히 살아가는 내 자신을 보여드리고 당신의 자부(子婦)까지 이제 생겼으니 더 얼마나 기뻐하실까 싶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내 생일인데 더욱 간절하게 바라는것은 우애와 화합으로 단란한 가정이 된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늘 일이 없어서 놀다가 요즘들어서 얼음작업과 명태작업이 동시에 벌어져서 내속을 태웁니다. 몸은 하나인데 일은 두개이니 어떻게 해야 잘하는것인지도 모르겠고 하나를 얻을려면 하나를 놓아야합니다. 마음같아서는 두개다 잡고 싶은데 세상은 나혼자 사는것이 아닌까닭입니다. 병원을 잘 다녀오고 처음으로 3개월치 약을 받았고 예비 며느리도 생겼고 이제 더 잘사는것이 내게는 큰 축복인것같습니다. 올해겨울에 행운목에 꽃이 피더니 우리집에 이런 좋은일이 생기려고 그런것같습니다. 여기 오시는분들 모두 저의 생일을 축하해주시고 저 위 케익을 다 같이 함께 드시고 저를 많이 축복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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