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한달간을 아들 결혼식이라는 일생의 중대사에 메달려서 거의 전력투구를 했습니다. 이번 아들결혼식에는 제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의 전쟁으로 월남한 피난민의 2세인지라 부산쪽에 친척이 없는 관계로 그 누구도 저를 대신할수 없었습니다. 또 제가 지병인 심장병이 있다보니 참 한심하게 이러다가 잘못해서 또 다시 내가 누어버리면 어떻게 하나하고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이 심장병이라는것이 요즘 거의 술을 하지않지만 그래도 잔치인지라서 조금의 술을 마시게 되었으니 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이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수가 있었습니다... 일단 저의 아들 결혼식을 잘 치를수 있게 해주신 많은 하객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요. 이 기쁨을 모두 함께 하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 초등학교 동창친구들이 제일 고마운것 같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감천이란곳에 2학년때 서면의 부전국민학교라고 지금의 서면의롯데호텔자리에 있는 학교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래도 내가 아는 우리가정사에 제일 행복한때 같았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서면의 대한극장 자리에서 우유대리점을 운영하시고 제법 살림이 조금은 여유가 있었는지 제 기억으로는 용당에 모래구찌라는곳에 가족이 다 모여서 해수욕이란것을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것이 서면살때인데 어느땐가 다시 살림이 경제사정이 악화되어서 감천이란곳에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 당시 감천이란곳은 사람들이 그런동네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다만 엄마의 사촌언니가 감천에서 고물상 사업을 하시는 사촌형부가 있는관계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싶어서 감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면이란 사람이 많이 바글 거리며 살던곳을 떠나서 흙먼지 풀풀나고 책가방이 없어서 책보자기를 등에 둘레 메고 학교다니던 아이들과 만나게되었습니다. 이렇게 여기 감천이란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고 어린시절을 학교가면서 똥통(그 당시에는 화장실을 퍼서 큰밭을 깊이파서 그곳에 다 모아서 버렸던) 을 지나서 밭을 지나고 묘지도 지나서 학교를 가고 여름이면 아이들과 수영을하고 멸치 쌂은것을 주워먹으며 다닌학교도겨우 5학년 2학기가 되면서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시는바람에 살림이 완전히 파산지경에 이러러 다시 원 고향인 좌천동 산꼭대기로 이사를 하게되었습니다. 일생동안에 학교 다닌기억이라고는 이게 전부 다 인것같습니다. 이렇게 어린시절에 만났던 친구들이 이번에 아들 결혼식에 약20여명이 참석을 했고 인편으로 부조금도 보낸분까지 약 30여분이 축하를 해주시는 바람에 역시 친구는 옛친구가 제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여자동창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남자친구는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데 여자친구들은 솔직히 기억이 힘듭니다. 그리고 저의 어린시절부터 함께 같은 업종에서 일하면서 근 30년을 함께 해준 직업친구 계원들이 고맙고요... 어느 한분 안 고마우신분이 있겠습니까만.. 같은 직종에 감천부두로 인해서 같이 밥먹고 사는 직장의 선배제형 그리고 동생분들이 많이 고마웠습니다. 아까 말한바와 같이 저는월남 가족이다보니 이번 결혼식에는 제친척은 8명참석했습니다. 겨우 8명중에 형수와 조카둘에 조카사위그리고 형님네 안사돈과 그아들 .. 그리고 감천의 외가쪽에 5촌친구와 6촌친구둘다초등동기입니다. 이렇게 모두 8명이 저의 아들결혼식에 제친척으로는 모두였고 그리고 집사람의 처가는 그래도 정읍에서 글깨나 읽는집안이라서 가족이 약 30분가까이 모여서 잔치집 기분을 나게하였습니다. 이번에 아들 결혼식을 하면서 정말 손님이 너무 없으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나다닐까 하고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기우도 잠시 예식장에 가서보니 우리집 아들 축하하러와 주신 손님이 약 200분정도이시고 그중에 제손님이 130여분이 참석해주셨고 아들 손님이 약30분 그리고 안사람의 손님이 약40여분이 참석해주셔서 저의 기대에 분에 넘치게 정말 많은 손님이 참석해서 아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셨습니다.
정말 피붙이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 두발로 이 만큼 일어섰을때 내가 과연 세상에 어느정도의 필요한 사람인가를 많이 생각하게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알아주시고 저사람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남들이 이정도면 괜찮다고 인정해주시니 너무 고마웠습니다. 솔직히 이 냉동운송업계를 근 30년간 지켜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서 그래도 나를 기억해주고 우리 아들이 결혼을 한다니 모두 축하해주시니 제가 그리 헛되게 살지않은것을 말해주는것같습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저는 음료수를 여러밖스를 사서 차에 싣고 다니면서 각 사무실마다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올렸습니다. 물론 제가 접대도 제대로 못해드리고 대접이 소홀했지만 저의 마음만큼은 축하해주러 오신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올려야하였기에 사무실마다 인사을 했고 그리고 아들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뒤에 이번 결혼에 일등공신이신 우리사무실의 안씨 어르신에게 인사하러 온가족이 함께가서 인사드렸고 .. 다음날에는 형님이 안계시다보니 형수님이 어른이라서 형님집에 찾아가서 형수님께 아이들 인사를 시켰습니다.. 모두들 흡족해 합니다. 사람이 다 사람이 아니고 근본을 지킬줄알고 예의를 지킬줄알아야합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한동안 저 역시 이런사소한것을 챙긴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근간에 저에게 부조하신분중에 또 몇일사이에 상을 당하신분들이 두어분 계시고 세상은 계속 돌아갑니다. 이제는 거의 다 인사를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이냐하면은 아들 결혼식전에는 일이 많다가 결혼식할때는 작업할 고기배도 들어오지를 않아서 마음편하게 먹고 정리를 할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가 있었으니 이 또한 큰 복을 많이 받은것같습니다.. 이제는 다시 일해야합니다. 아들의 결혼식은 여러친구 선배 제형님들의 성원으로 성황리 끝이났으니 이제 부터 나의 일만 또 부지런히 해야하겠습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것입니다.. 이제 다시 부지런히 돈을 모아서 또 딸을 출가를 목적으로 열심히 살아야할것같습니다.. 이렇게 하므로서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것같습니다. 저의 생활은 거의 없는것같이 살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가면서 인생을 배우는것같습니다. 여러친구 선배제형님들 아들 결혼식을 축해주셔서 많이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