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설 선물.

짬스탑 2009. 1. 24. 14:43

 

조금전에 큰 설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번 명절에 내가 무슨 큰 선물을 받았는지 모두들 궁금하시겠지만. 뭐, 뇌물이나 금먹인 참굴비같은것은 아니니 걱정들 붙들어메시고 ... 저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소.... 저기 멀리 강원도 땅에 장모님과 큰처남이 살아갑니다. 큰 처남은 고향이 정읍이지만 아주 어릴때 부산으로 집이 모두 이사를 해서 거의 부산 사람이라고 보시면 맞을것같습니다. 처가집이 우리집 만큼 가난한 집안에서 장인어른은 그래도 옛사람이라서. 남자가 가부장하던때에 그 말한마디면 모든 집안의 법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는 남자들이 설것이도 잘하고 부인네 살림살이도 도와주지만 예전같으면 불알 떨어진다고 부엌근처에는 남자 얼씬도 못하게 고이 길렀습니다. 그런 가부장시대의 사람인 장인어른과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하는곳만 배우신 우리 장모님이 혼인을 하여서 장인어른의 불장난같은 소꿉놀이에 희생양이되어서 젊은날을 다 허비하시고 늙으막에 자식들이 잘되는것을 보면서 호강할줄알았는데'' 그것도 하늘의 시샘인지 아들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이제 팔자가 필려나 하는찰나에 그만 넘어지셔서 다리를 다쳐서 나이 60에 고관절 수술을 받으셨는데 모든 자식들이 자기들 먹고 살기바빠서 재활치료를 의사와 병원에 맡겨놓았던것이 .. 장모님의 아픔과 통증으로 물리 치료같은것을 당신자신이 일부러 않하셨는지 그만 완치는 되었는데 물리치료를 게을리해서 뼈가 그만 그대로 굳어버려서 걷지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막내처제가 모시다가 트러블이생겨 불상사가

일어나고 해서 처남이 있는 강원도로 장모님도 들어가시게 되었던것입니다. 결국 장모님의 성남집을 팔아서 조그만 처남의 아파트옆에 작은평수를 마련하고 처남댁이 수고를 하며 조석으로 식사수발을 들고 오랜 고생을 하다가 결국에는 70연세가 넘으시니 바깥활동도 못하시고해서 약간의 치매증세가 있어 결국 아래층에 피해를 주고 옆집에서 민원이 들어오고하더니만 밑의 사람들이 아파트를 팔고 이사를 가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장모님을 요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이나서 근처 노인요양원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우리 처남 참 나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친구입니다. 나도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고 내가 돈을 벌어오지않으면 온 식구가 굶어야하는 그런 지경이라서 공부 같은것은 꿈도 못꿔보고 살아왔습니다.

 

지금의 우암동 시장입구에서 장인어른이 작은 구멍가게로 호구지책을 마련하고 장모님과 저의 집사람은 신발을 만드는 국제고무에 일하러다녔습니다. 장인어른의 무능력으로 무한대로 떨어지는 경제력에 모든 가족들은 일할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돈을 벌어서 남아있는 가족들을 먹여살려야했던 절박한 그런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우리집사람과 저는 그뒤 처가네 사정은 잘 모르겠고 내가 18살때 집사람과 연애도중 우리집으로 모셔왔기에 그 뒤에 처가 사정은 잘 모릅니다. 우리부부가 아이를 낳고 한 5년후에 처가를 방문할수 있었는데 그때 장인어른께 허락을 받고 결혼의 승낙을 받을수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 처남은 부산대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없는집에서 대학가면 학비가 큰 짐이 됩니다. 우암동 집에서 처남은 불도 어두운 골방에서 죽어라고 법에 관한 책만 보고 공부를 하더군요. 나하고는 한살 차이인데 대학생인것은 부럽기는 했지만 그 집의 형편으로는 대학교 공부와 사법고시는 꿈과 같았던 시절입니다. 어느덧 처남은 대학졸업을 하고 사법고시를 쳤는데 일차는 제법 여러번 합격을 하더니만 이차시험에서 번번히 낙방을 합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서 가세는 기울고 도저히 돈을 벌지 못하면 살수 없는 지경에 이러러서 결국 일반 회사인 삼성반도체에 입사원서를 내서 너무 쉽게 합격을 합니다. 그로부터 3년간을 삼성맨으로 잠도 못자고 말단 사원생활을 해서 돈을 좀 모아서 주식을 사서 공부할 자금을 착실히 모았습니다. 회사생활이라는것이 누구나 하는것이지만 남의돈 먹기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아침 8시부터 밤10시까지 코피터지게 일을 해서 월급을 받아서 집에 장모님에게 좀 보내고 자기의 꿈을 저축해가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돈이 공부할 밑천이 모였다고 생각하고 3번째 사시에 응시하면서 바로 근처날짜에 있는 법무행정고시도 보았습니다. 사법고시는 낙방이고 법원행정고시에는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고싶은 지역을 선택할 혜택으로 자격을 받았는데 글쎄 서울쪽도 부산도 아닌 조용한곳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강원도에 발령이나서 잠시 한 1년간 법무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00등기소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남들은 돈을 써서라도 도회지에 나오려고 안달일때 우리처남은 그놈의 사법고시공부 때문에 조용한 강원도 산꼴짝에서 월급 받아가면서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꾼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결과는 항상 좋은것만이 아닙니다. 강원도 이런시골에서는 있던 사람도 줄을 데서 다시도회지로 나가려는데 이런 촌에 자원을 해서 들어오겠다니 참 웃기는 이야기이지요. 결국 강원도 에서 배필을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때 우리처남의 장모되시는분이 어디 농협의 높은자리를 맡아보고 계셨는데 가만보니 참한 총각이라서 앞을 보고 딸을 투자하시겠단 생각으로 결혼을 시키신것같습니다. 근데 이때도 좋았습니다. 근 30세의 젊은 나이의 유도 전망한 젊은이가 등기소 소장이니 고급공무원이고 또 앞으로 얼마나 더 잘될까를 생각하고 계셨는지..? 일단 직장을 한번 잡으면 그 자리를 빠져나오기는 힘이듭니다. 공무원이라는 신분과 그래도 등기소장이면 그 동네의 기관장으로 좁은 시골에서는 대우받고 삽니다. 그것에서 그만 공부를 끝냈으면 우리 처남이 정말 탄탄대로를 갔을것입니다. 신은 조용히 잘 나가는 이런점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또 다시 부모형제의 꿈인 사법고시에 매달려서 드디어 대망에 꿈에도 그리던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드디어 이제 정말 법조인으로서 발을 내디디게 되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고 자신의 영광입니다. 여러곳에서 축하가 오고 자신도 일이 잘 풀려만 가는줄았습니다. 일단 그러다보니 공무원이 두가지일을 할수가 없으니 결국엔 등기소장을 버리고 사법연수원을 들어가야합니다.

그곳에서 주는 연수비용으로는 자기네 생활비도 모자라는판입니다. 어찌보면 안정된 등기소일이 더 편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더 좋았겠으나. 꿈에 그리던 법관의 자리에 올라가기위해서는 결국 등기소일을 포기합니다. 결국 서울생활을 하게 되고 궁핍하고 어려운 살림살이가 시작된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처남이 변호사가 되면 큰돈을 벌수 있을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판검사 자리를 할수 있음에도 그토록 가난에 신물이나서 돈과 명예가 따라다니는 변호사를 하고 싶었나봅니다... 그렇게 어렵게 변호사가 되어서 강원도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습니다. 우리 집사람 직장을 다니는때이지만 바로밑의동생이고 장남이라서 어려운 살림에 기차타고 버스를 여러번 갈아타고 7시간 넘게 걸리는 그 멀고도 어려운 강원도 까지 축하해주러 갔습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더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개업전날 아침 새벽에 기차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저녁어두워서야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자기동생이 변호사가 된다는것이 자기가 변호사가 된듯이 기뻐 했습니다. 저 역시 기뻣지요.. 그리고 처남의 사업은 초반에는 순탄하게 잘 흘러갔습니다. 근 6년을 순탄하게 잘 간것같은데 그 전부터 사법고시합격인원을 나라에서 해마다 1백명씩올려서 한해에 법관들이 약 1.000명씩 배출되서 쏟아져나옵니다. 이렇게되니 이 좁은 동네에도 인구는 줄고있는데 새로운 변호사가 속속 문을열고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좁은 동네에 개업한 변호사만 7~9명이 넘는데 거의 몇분만 빼고는 아사직전입니다. 지연이라든가 학연이라든가 인맥이라든지 모든것이 이 동네가 본토가 아니다보니 처남은 아무래도 난관에 봉착한것입니다. 쏟아져 나오는 연수원졸업자들이 발령을 못받으면 회사에 취직하거나 또는 개업을해야 하는데 우리처남도 화무십일홍이라고 결국에는 사무실에 경비만 나가는 형국이 오기전에 모든것을 마무리하는것이 제일 낫겠다 싶었는가봅니다. 결국 다음을 기다리면서 사무실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좁은 법률시장바닥에 서로가 출혈경쟁으로 무한경쟁으로 가격을 내리고 너죽고 나 살자식으로 가다보니 서로가 살기가 어려워서 존경받는 법조인들이 많이 아쉬워졌습니다.. 그리고 처남이 잠시간 은든 생활로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하고 남들과의 교류를 줄이고 두문불출 집에서 공부만 하는지 나는 알수가 없었지요. 근 2년을 이렇게 보낸것같습니다. 이번 설을 앞두고 저도 맏사위가되어서 별로 하는것은 없지만 처가걱정에 늘 생각도 합니다. 장모님과 바로밑의 처제 그리고 그 형제들... 내가 형편만 되면 많이 도와주고 싶기는 한데 ... 나 역시도 이러구 사니 말입니다.... 조금전에 아주 좋은 소식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번 설 명절 선물로는 제일 크고의미있는것같습니다. 강원도에 있는 처남이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에 국선변호인단 인선에 자기가 응시했는데 의외로 결과가 좋아서 국선변호인단에 선출되었다고 기쁜목소리로 전화가 수화기를 타고 흐릅니다. 어찌 이리 좋을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한동안 두문불출하고 조용히 살다가 다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고 대접받고 일할수 있는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재기에 성공했다는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운소리입니다.. 자리가 어디이든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결과가 말해줍니다.. 처남 축하하네..... 그리고 이런 설 선물을 너무 멋지게 내가 받는것같아서., 좀 황송스럽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일보시거든 어렵고 돈없어서 국선변호사를 선임하시는 어려운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사랑으로 성심 성의것 해주시길를 바라네... 가지지못한자의 어려움을 많이 헤아려서 정말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대변인 노릇을 해주시기를 내 바랄께... 설 명절 잘 보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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