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의 미 문화원이던곳이 지금 이렇게 바뀌었입니다.
감기몸살로 몸이 정상이 아니지만 내일아침 일찍 기차를 타야하는 입장이라서 인터넷으로 예매해둔 기차표를 찾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당일날 역 창구에서 바로 찾으면 되지만 출발시간이 아침일찍은 시간이라 혹시라도 실수가 있어서 문제가 생길까봐. 감기로 몸이 무거운데 누워 있으면 더 사람이 늘어지니 움직여서 풀생각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시간도 있고 몸도 좀 추스릴겸으로 내 차를 놔두고 오랜만에 대중교통인 버스를 타보기로 했습니다. 늘 작은 내 승용차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1천원을 내고 큰 차를 전세내서 느끗하게 자가용 기사를 대동한 버스에 몸을 실고 보니 작은차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여러 사람들이 무슨일을 해서 벌어먹고 사는지 자주 올라오고 자주바삐 내려갑니다. 버스는 구평산고개를 돌아서 감천을 지나 남포동을 거쳐서 부산역 까지 막힌길 없이 잘 달려갑니다. 일년에 한번 탈까 말까 하는 기차를 그것도 KTX를 집사람과 둘이서 오랜만에 서울 여행을 하는것 같습니다. 뭐, 서울 여행을 하고 싶어서 가는것은 아니고 이번 토요일 안산시청앞의 안산교회라는곳에서 셋째처제가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이 결혼식이 예정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지금쯤 통영항에서 참치 그물을 한차 가뜩 실고서 아마 부산으로 올라오고 있는중이었을것입니다. 그러면 그 그물을 내일 풀어야 하는데 저는 내일 결혼식이 있으니 그 일을 할수 가 없는것이지요. 운임도 한 50만원정도 준다는데 돈이 문제입니까.. 가족의 행사가 돈보다도 더 중요하니까요.. 일단 부산역에 큰 1천원에 전세낸 버스에서 내리니 역광장이 싸늘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뒹굴고 역앞에 자리 잡고 놀던 노숙자들도 날이 차지니 소주병을 옆꾸리 끼고 햇볕이 잘드는 쪽으로 여러명이 누어 있습니다.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벼개삼아서 잘도 쉬고 계십니다. 날이 차지면 그 삶도 �지만은 않을터인데 말입니다.... 내가 지금 남의 걱정하고 있을때가 아닙니다. 몸이 피곤한것이 머리가 띵하고 감기 기운이 역력한데 몸이 자꾸 늘어져서 좀걸어야 겠습니다. 일단 예매기계에게 다가가서 내가 예매한 티켓을 토해내라고 명령을 했는데 아 , 이놈의 기계가 비밀번호를 넣어라고 하네요... 그래서 비밀번호를 넣도 않되고 또 넣어도 않되고 화가나서 하는수 없이 창구로 올라갔습니다. 창구에 가서 안내하시는분에게 말을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다 예매를 해놓았는데 기계가 표를 않준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저보고 주민등록증을 달라는것입니다. 그래서 건내줬습니다.. 예매된 티켓을 끊어주며 하는말이 비밀번호가 나는 6자리를 해놓았는데 여기는 4자리라서 기계는 않되고 오로지 창구에서만 된다고 합니다. 일단 그런 우여곡절을 격고 이제 부산역을 빠져나옵니다. 광장에는 낙엽만이 뒹굴고 내일 안산의 결혼식은 날이 좀 추울것 같습니다. 어릴때 이 근처에 살았기에 초량뒷골목길은 훤합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어릴때를 생각하며 한번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지하도를 건너 화교거리에 들어섭니다. 부산에 근 50년가까이 살았지만 이렇게 보고 싶어서 추억을 다시 생각하고 싶어서 걷는것도 처음입니다. 유명한 차이니즈 레스토랑으로부터 러시안 까페에다가 여기는 부산의 텍사스거리입니다. 얼굴도 가지각색에 피부도 다른 인종이 스산한 가을바람에 아직은 이른 장사준비에 모두들 한가합니다. 중국집안을 들여다보니 예전에 어릴때 먹어보던 중국식호떡 (일명 공갈빵)도 보이고 여러가지 요리가 진열쇼케이스에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어디를 가도 있다는 중국식당이 부산역 바로앞 길건너에 큰규모로 화교거리를 이루며 많은 화교가 장사를 해가며 잘 살고 있습니다. 요 근래 김영삼 정부이후로는 러시안들이 많이 몰려오는 바람에 러시안 카페가 우후죽순격으로 많이 생겨서 자리를 하고 있고 러시아 마피아의 근거지로 부산 텍사스도 한자리 하고 있는것입니다. 감기 몸살도 그렇지만 누어있으면 몸이 더 무거우니 내 생각에 조금 움직이면 더 좋아지겠지 싶어서 이번에는 동광동 산 꼭대기로 갑니다. 이곳은 예전에 일제시대부터 있던 절벽위의 동네로서 지금 부산 중부경찰서 바로뒷골목입니다. 그 밑의 큰길들은 일제시대이후에 매립된땅으로서 예전에는 바다였고 지금 내가 걷는 이길이 원래 조선시대때부터 있던 본길입니다. 한참을 걸어올라가니 부산의 인쇄의 메카인 동광동 인쇄골목이 나오고 바로밑에는 6,25피난시절에 눈물겨운 40계단이 있습니다. 걸어서 나도 유람아닌 유람으로 부산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길을 건너 용두산공원밑에있는 한국은행을 지나서 예전에 미 문화원을 지나다가 문뜩 뭔가를 봤는데 무슨 기념관이라고 써있는것 같았는데 입장료는 무료라고 적혀있어서 그냥 한번 들어가 봤습니다. 원래 이 건물은 일제시대때에 만들어진 건물로 일본사람들이 조선찬탈을 목적으로 세운 동양척식 주식회사가 있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던것이 8,15해방이 되면서 미군이 점령하고 그 곳을 그후 미 문화원으로 계속 사용하다가 김영삼 정부이후에 한국에 반환되어서 지금은 부산의 역사 박물관 이되었습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실을 1층부터 샅샅이 둘러봅니다. 별로 입장객들은 거의 없고 조용하니 관람하기 좋습니다. 1900년부터 지금까지의 부산의 변화와 근대화 과정의 역사와 일본의 침탈로 얼룩진 세월과 미군정에서 최근까지의 기록이 전시 되어있고 예전의 부산모습을 볼수있게 기록적 배치를해놓았습니다. 크게 볼거리는 별로지만 그래도 부산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이런공간을 만들어진것도 민주화가 이룩한 대단한 쾌거입니다. 구경을 대강하고 감기 때문에 머리가 울려서 머리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국제 시장에 아는 형님을 좀 만나고 싶어서 들렀는데 안계시고 그 앞에서 장사하시는 이북 아바이만 만나고 악수 하고 왔습니다. 버스를 타려고 정류소에서 앉아서 군밤을 까서 먹고 있는데 버스가 왔습니다. 하나로 카드를 찍으려는데 손이 카드를 가로 막습니다. 트럭하던 후배가 96번 버스 기사를 합니다. 그 후배가 운전하는 버스군요. 그래서 또 1천을 벌었군요... 이제 안산갑니다. 처제는 고흥 류씨가문의 세째딸입니다. 원래 고흥류씨는 양반인데 글읽는 학자가 많은 집안입니다. 한글로 쓰면 유도 되고 류도 한자로는 버들(柳)를 쓰는데 무식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쓰는지. 일단 처가는 정읍에서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장인의 판단이나 그 때의 사정이 어떠했는가는 잘 모르지만 돈이 없어서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이주를 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와 우리 집사람은 만나서 독립을 하게 되게 그 후 장인집에는 어린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습니다. 처남이 둘 처제가 셋 아이가 내 처 빼고도 다섯이었고 장인은 몸이 않좋아서 돈 벌이를 못하니 가세가 기울고 장모가 직장을 다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큰 처남은 그래도 공부가 앞으로 먹여살려줄것이라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입신양명했지만 누가 밀어줄 사람이 없어서 요즘은 찬밥신세입니다. 그 좋은 자리 법무부 사무관을 지내다가 법원등기소 소장으로 오랬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돈을 좀 벌어볼려고 사법고시를 꿈꾸다 마침내 사법고시를 패스 합니다. 좋은 등기소 소장자리를 헌신짝 내던지든 던져버리고 사법연수원을 들어가서 모든과정을 마치고 변호사를 개업했으나 사업이 시원찮아서 지금은 폐업을 하고 그냥 집에서 쉬고 있는 백수 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집이나 처가가 원체 없는 집안이라서 처제들도 자기들이 벌어가면서 초급대학을 다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결혼하는 처제는 처음 시집간 집에서 시어머니와의 여러가지 불화때문에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부모의 불화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아마 돈도 없고 배운것도 쉬원찮다는것이 시어머니의 불만으로 아이를 못 가지게 밤에 아예보초를 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픈시간이 어느정도 아물어가고 신앙생활에 익숙해갈때쯤 교회에서 또 한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또 인연으로 역어지는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저도 잘 모릅니다. 모든것 저희들이 알아서 한다니 우리는 올라가서 예식이나 참석하고 축하나 해주고 올일입니다. 큰 언니로서 동생들에게 해준것이 없어서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집사람 직장에서 월차휴가도 안해주고 결근처리 한다는데도 올라갑니다. 끈끈한 형제애때문에 장모님이 몸이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 우리 집사람이 어머님 대신 노릇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째 처제 철이 좀 들었을까요..... 큰 언니가 보면 언제나 철없는 동생입니다. 부디 결혼해서 아무탈없이 잘 살아주면 여러 형제가 고마워하겠지요.... 진미령........ 내가처음으로 여자가되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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