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이 끝나던 날
그 확연한 변화에 놀란 마음
타는 듯한 열염(熱焰)은 떠나갔네
물결도 놀이도 떠나갔네
풍경들은 훨씬 파리해지고
시간은 움츠러들고
아직 물빛이 반사되기는 하지만
그 물은 아득히 멀어지네
여름의 징후는 가라앉았네,
깃발도 내려오고
되찾을 수 없음이여
..여름이 끝나던 날 - 고트프리드 벤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에는 - 최영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