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세상속으로...

짬스탑 2011. 4. 15. 16:52

                             (구감친구가 다대포에서 찍어온작품)

늘가는 세월이지만 봄이 오니 새소리에 꽃피는소식도 들리고 
친구들의 근황도 봄바람을 타고 솔솔들려오는봄입니다.
천마산에 야생벚나무가 활짝꽃을 피우고 산허리가 연분홍으로 물들어가면 
우리어릴때 그산에서 전쟁놀이하고 놀던 기억이 새삼떠오르고 나무로 깍아만든 총과칼로 
전투놀이에 열중해서 해지는줄도 몰랐던 어린시절이 더 그립기만한 봄날의 오후입니다.
예전에는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라서 한40여년전에는 못사는게 흉이 아니였습니다.
집집마다 감천골짝의 아이들은 기성회비를 못내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독려코저 
집으로 돌려보내서 부모님에게 기성회비를 받아오게 수업시간을 배제하고 
각자 집으로 돌려보낸적이 많았습니다. 
학교에서도 교무행정을 운영할려니 돈이있어야하는데 그돈이 기성회비라는 제도였는데
요즘말로는 수업료정도 되겠지요.
그때는 그런걸 몰랐습니다.
그돈을 받아서 학교살림을 꾸려나가는것인데 그 당시 1970년도에는 감천이란곳은 
아주 빈촌이었던관계로 한반의 절반정도는 아니겠고 거의 1/3정도는 
기성회비를 못내고 학교를 다녔던것같습니다.
선생님도 늘 교감선생님으로부터 기성회비가 안걷어진다고 잔소리를 해데시고
아이들은 회비를 납입을하지않으니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집에 돈이 없는줄을 아시면서 
다른선생님들 눈치가 보여서 또는 교감에게 체면치레로 아이들을 집에 보내고 그러셨지요.
그 당시에도 이리 벚꽃이 활짝피었나봅니다.
아이들은 집에 가봐야 모두들 직장에 부모님들이 일하러가시고 아무도 없는집에 가봐야
별뾰족한수도없는것을 알기에 그냥 집에가서 밥이나 한그릇 먹고 다시 학교에 돌아옵니다.
그 누구도 회비를 챙겨온아이들이 없던시절이었던것입니다..
이번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릴때 초등학교에 같이 다녔던 친구말입니다.
그 친구가 다른친구의 소식을 들었는데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처한친구를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그런좋은착한마을을 가졌기에 그냥 생각나는대로 한번 써볼려고합니다.
어린시절은 그렇게 흐르고 부모가 재정적으로 잘풀린아이들은 중학교도 가고 
고등학교를 마치고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개중에 절반은 진학은 초등학교로 마친아이들도 태반이고 또 절반은 중학교와 
또 절반은 고등학교를 마쳤던것같습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모두 20대에 접어들면서 사회로 진출하다보니 그 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나이가 한40이 넘으니 동창이라고하는모임이 있고 학교를 많이 나오지못한 친구들은 
초등동기모임이 전부였는데 이곳을 가면 친구들이 소식을 접할수있고 예전에 좋아하고 짝사랑했던 
친구들까지 얼굴을 보지못해도 어떻게 살고있나 소식을 접할수있게되니 동창모임이 참좋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친구는 이름을 밝히지는 않겟습니다.
이친구는 글을 쓰는 저도 잘모르는친구입니다.
다만 같이 동문수학을 한것으로 이야기만 듣고 이렇게 글을쓰는것이니
다소 틀리거나 반박할내용이 있더라도 모르는체 덮어두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 사람이 나이가 20대에 접어들면 어엿한 성인으로 자리할때입니다.
이 친구네 가정은 그당시에 완고한 부친밑에서 엄격한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것으로 들었습니다.
부친은 감천의 반공연맹의 직함을 가지고있는 국가관이 투철하신분이었는데..
그 친구가 살았던집은 아시는 친구들이 있는가 모르겠는데 ...
예전에 평양상회길건너 왕서방 자장면집 바로뒤였다고합니다.
감천에 산다는것이 그당시에는 다 그랬습니다.
우리친구는 나이가 차고 하니 이제 일을해볼욕심으로 세상물정도 어둡고
아무것도 아는게 없는상태에서 돈을 벌어보겠다고 근처의 지인으로부터 약간의 경비를 빌어서 
서울로 돈벌러 떠납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이일저일 이공장 저공장을 떠돌다가 드디어 한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직장이 간판집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그당시에는 간판제작업체에서는 그 것도 기술이라고 
먹고자고 하는것외에 월급이라고는 거의 쥐꼬리만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수도서울에서 살아가니 그 자신도 좋았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살면 필요악이란게 있습니다.
이게 돈이란놈인데 ...
이 친구 서울에 살아도 본디 집이 부산인지라 한번씩 다녀갈일이 생기고 하여돈이 필요했는데 
간판제작사의 사장은 먹고 자고 하는것외에 급료를 잘주지않아서 
급료때문에 자주 트러블이 생기고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부산을 다녀갔는데 다시 서울올라갈 차비가 없어서 친구형님에게 서울올라가면 
급료받아서 형님에게 빌린돈을 꼭 부쳐드리겠다고 이야기하고 서울가는 경비를 빌립니다.
그렇게 어렵게 해서 다시 서울로올라갔는데 서울에 직장에서 간판제작사 사장에게 
밀린급료를 줄것을 이야기하자 그 사장이란자가 돈을 못준다고해서 
그 날 심하게 싸웠던것으로  이야기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화가 너무 심하게나서 그날밤에 사장집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지르게됩니다.
평소에 술도 잘못하고 샌님같이 얌전한 친구가 일시지분을 참지못하고 너무 괘씸해서 
앞뒤를 재볼것도 없이 그냥 신나를 뿌리고 불을 질러버렸던것입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잘때까지 기다려서 불을 질른것같습니다.
결국 간판집 사장은 죽고 그 사장부인은 심한화상으로 좀더 살았다가 사망한것으로 
신문에도 나고 굉장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이 친구는 법의 테두리안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서 모두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습니다.
그 친구의 가족들이 감천에 살았는데 이 친구를 살려보겠다고 백방에 탄원서를 넣고 
없는돈에 변호사를사고 그친구 역시 수형생활을 잘하고해서 사형에서 무기로 그리고 
3년전에 25년정도의 형을 마치고 출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친구바람에 가족들의 피해역시 말못할지경이었다고합니다.
그 바람에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시고 이제 여동생둘만남았다가 다 출가하고 
엄청남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친구의 출소는 어려움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사형은 면하게 부모님등의 정성에 답했는지 무기가 되고 무기가 감형에 25년복역했습니다.
일단 출소를 했으나 사회와 담을 쌓은지 25년....
시대도 변하고 사는방식도 변하고 모든것이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안에서 교화교육을 받은것이 사람을 더 어리게 바보같이 만들어버려서 
이 사회에 나와서도 뭐 할줄아는게 없습니다.
사회복지 프로그램이라고 이런사람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할줄아는게 
어려서는 간판일말고는 할줄아는게 없는터이라서 일단 간판일하는곳을 추천해서 입사해서 
일을 하게되었으니 자기는 30년전의 실력이고 지금의 젊은 2~30대는 아주 능력이 
자기의 배가되도록 일을 잘하다보니 자기가 일을 못한다는것을 남들이 알게되면서 
자꾸만 같이일하는 어린동생들과 갈등이 빗어지게되었고 또 그바람에 싸우고 나오게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결국 할수있는 일이 없다는겁니다.
교화프로그램이 사람을 아주 바보로 만들어놓아서 어느업종에가도 사사건건 문제가 되고 
싸우게되고 일을 못하게되는겁니다.
사람이 살려면 의식주 해결을 해야하는데 도저히 사회적응능력이 부족해서 직장이 안되는겁니다.
우리동기중에 구의원이 있습니다.
구의원 이 친구도 간판하는 친구의 딱한 사정을 잘알기에 백방으로 노력해서 직장을 잡아준것으로 
들었는데 또 사흘도 못가서 그만둬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친구가 돌아갈곳은 25년넘게 있던 그곳이 그리운것인지 소생크탈출이란 영화같이 
다시 그자리로 회귀하려고 더 노력하는것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요즘도 역시 그런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현재 이친구의 사는 모습을 여기서 잠깐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친구는 사회복지법인에서 다대포 영세민임대아파트에서 한달에 집세15만원을 내는
아파트에 기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응 부적격자로 영세민혜택에서 나오는 월30만원의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간다고합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사회에 적응되기 힘든상태인지라서 다른 좋은 취업프로그램이며 
여러가지를 자기자신에게 채찍질하면서 사회에 동화되기를 노력해야하는데 우리의 바램뿐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다행인것이 이친구는 술은 일체 못한다고 하니 그것은 참잘된것같습니다.
이번에 이 친구를 좀 도와보자고 한친구가 나섰습니다.
그 친구 마음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솔직히 저역시 동문수학했다는것이외에는 아는바가 없지만 
한 30년만에 이렇게 나타난 친구를 물심양면도와보겠다고 하는 그 마음은 정말 아름다운것입니다.
이번에 우리친구들이 한번 도와보려고 동기회 기금이라도 있으면  보탤려고했는데
동기회는 작년까지 와해되어서 재정한푼없고 이번에 내가 총무를 맡고 
박영호친구가 회장을 맡아서 다시한번살려보려는데 뭐가 있어야 도울수가 있지요....
친구가 어려울때 힘을 줄수가있고 친구가 어려울때도와줄수있는 그런 동기가되었으면 
정말좋겠다는 생각에  어줍짢은 짧은글 한자 올려봅니다...
읽어보신분중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죄송스럽지만 또 어려운 한친구를 도울수있다는것도 
한친구에게는 큰 희망을 주는일입니다.
다만 우리주위에 이런친구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주시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