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딸이 떠난 빈방을 보며..
짬스탑
2011. 3. 8. 13:13
딸애 결혼식에 바빠서 정말 정신줄놓을뻔한 2월이 가고 어느덧 3월도 중순을 바라보고 산에는 파란풀들이 물을 한껏빨아들이는 봄이 오는것을 느낍니다. 날씨는 맑고 좋은데 그래도 온도는 영 개구리가 나오기는 좀 어려운것같은 낮은온도에 저와 우리집사람까지 딸애 결혼이후로 계속해서 지금까지 감기몸살로 고생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 우리 온가족이 행사를 치른다고 정신없이 설치고 다니더니 드디어 다 정리하고나서는 그만 감기몸살을 얻어서 그 땜을 하는건지 나는 계속 쏟아지는 헛기침에 목안이 따깝고 아프것을 가기싫은 병원을 다녀도 차도가 없더니 이제야 조금 회복되어서 겨우 어디 다닐수있을정도의 체력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아직도 감기약을 달고사는형국입니다. 우리 집사람역시 감기몸살로 영양제를 링거로 투약받고 좀 많이 나아졌지만 흐르는콧물을 감당하기가 어려운모양입니다. 역시 혼례라는 대사가 크기는큰가봅니다.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더니 과연 그말이 맞는가봅니다. 그렇게 딸을 결혼시켜보내고 신혼여행을 잘다녀왔습니다. 다녀오더니 선물로 엄마에게는 국산가방을 나에게는 국산 허리띠를 선물로 사왔더군요.. 나는 선물 필요한것이 없다고 안해도된다니깐 한4~5만원짜리 벨트를 하나 사왔는데 역시 그 아버지의 그딸이라서 비싼것은 안사오고 국내산 그정도로 사왔습니다. 내심 뭘 큰것을 사올려고 하고 기대는 안했지만 그래도 좀 좋은것을 안사오겠나 했더니 자기 아버지같이 실용주의를 찾는딸이다보니 명품이나 비싼것은 아니고 그냥 시중백화점에 파는 그 정도의물건을 사왔습니다. 폐백절할때 큰절값으로 많이는 못줬지만 그래도 제법줬는데 그래도 아버지는 좀 섭섭합니다. 엄마는 절값만큼의 돈의 가치만큼 가방을 사왔는데 나는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했더니...ㅎㅎㅎ
일주일 그러니깐 4박5일로 푸캣이라는곳을 다녀왔는데 우리딸은 여행체질인지 아무곳에서 물마셔도 음식도 가리지않고 잘 적응해서 문제가 없었는데 ... 사위는 물갈이를 해서 배탈설사를 해서 한이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여긴 겨울인데 그곳은 초여름같은날씨이니 돌아다니고 여행하기는 좋았다고 합니다. 근데 우리딸에게 여행경비는 많이 못줘서 보냈지만 여행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뭐 남는 떡이나 자기에게 떨어질 콩고물같은것을 다 기대하고 있었는가봅니다. 근데 우리딸말입니다. 정말 짠순이거든요.. 우리 형수님이 부조를 많이 했는데 공항면세점에서 달랑 디올의 립스틱셋트하나 사고요 우리 며느리에게는 그냥 립그로스 하나 사왔더라구요.. 우리집사람은 가방을 받았고 나는 허리띠지만 다른분들에게는 너무 황당하리만치 적은 선물을 사와서 우리집사람도 놀래고 나도 놀랬습니다. 이것을 결국 우리집사람이 교통정리를 해야했습니다. 형수님에게줄 디올의 립스틱셋트는 며느리로 격상시키고 형수님줄것은 우리집사람이 다음에 쉬는날 백화점가서 화장품셋트를 다시 사야한다고합니다. 이달 말일경에 어머님제사가있어 그때 올라가면서 드리면되니 시간이 있으니말입니다. 하긴 1인당 외화 사용통관액이 400$정도라고하니 다른식구들 선물살려고 하면 금액초과되기도 하겠지만 세금조금 더 내고 사다주면 우리도 편했겠는데 말입니다. 자기네들도 친구며 시댁 사돈선물을 사려면 통관금액이 오버가되니 그런문제가있을거라지만 들어와서 백화점에서 조금 좋은것사다주면되는데 아버지를 닮아서 무지짠순이 표를 냅니다. 일단 그렇게 결혼식정리는 끝나고 나는 그때부터 혼례식에 찾아봐주신분들에게 인사하고 돌아다닌다고 저역시 바빳습니다. 저와같이 일하는 운수업계 사무실마다 떡을 한되씩해서 음료수와 축하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러 근일주일을 다녔습니다. 근처에 우리같은업중에 사무실이 한여닐곱개가 되는데 그것도 다 찾아볼려니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인사를한것이 지난주에 거의 다 끝났습니다. 몸도 이제 조금 감기가 낫고하니 상태가 회복되는것같습니다. 이번결혼식은 지난번 아들할때부더 손님은 좀 적었지만 그래도 제가 세상을 그리 나쁘게 살지만은 않았나봅니다. 그래도 많은분들이 축하해주러오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예전엔 정말 아이 넷 다섯가지신부모님들은 그옛날 어떻게 혼사를 다 치르셨을까 싶은것이 근1년만에 결혼을 또 한다니 어디 청첩장을 내밀기가 무안할정도였습니다. 어떤분은 날 놀린다고 1년에 두번치운다고 능력있다고 하시는분 어떤분은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시는분 내또래이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리신분들이 벌써 두번이나 청첩장을 내미니 내손이 부끄러워서 혼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는 집안의 대사는 거의 다 끝나고 장모님 한분만 계시지만 다른분들의 혼사에는 부지런히 다니면서 갚아야할일만 남았습니다. 저 역시 받은부조는 부담으로 다가오지만 또 앞으로 부지런히 남의 좋은일이나 궃은일도 참석하고 조금씩 갚아나간다는 마음으로 항상 잊지않고 살아가렵니다.
우리부부의 예전에 결혼식할때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18살때부터 살림을 차려서 살다가 아이가 생겨서 좀나이가 들어서 아들이 5살되던해에 처갓집을 처음찾게되었습니다. 장인어른이 완고하신분이라서 처음에는 대화가 어려웠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벌써 아들딸이 다 생기고 이제는 장인어른도 고집을 마냥 피울수는 없는형국이라서 그냥 인정을 해주시고 식을 올리라는 결정이 떨어졌는데 그 당시 빈손으로 시작한 살림에 돈이 있을리가 만무고 예식장도 요즘같이 거창한것도아닌 동네 사진관 예식장이라고 그냥 사진관이층에 스튜디오겸 한30명이 들어갈수있는 셋트장같은 예식사진찍는곳에서 가까운 직장친구들과 주위의 가족분들이 오셔서 사진한장 찍는정도의 예식을 올렸습니다. 솔직히 먹고 살기도 어려운판에 신혼여행이라는것이 없었고 결혼식당일날 동래온천에가서 녹천탕이라고 하는목욕탕옆의 장급여관에서 온천을 하고 하루밤만 침대에서 자고 그 다음날 아이들이 걱정되어서 바로 나와서 집으로 갔습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시절이라서 그냥 그게 다였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집사람에게 항상 미안해하는것입니다. 아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딸은 2학년정도 된것같은데 아마 아이들은 이모가봐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신혼여행 솔직히 가기는 우리부부가 가야되는데 아직 우리부부는 제주도에가는 비행기도 한번 못타보고 이렇게 살고있습니다. 제주바다나 부산바다나 매일 이리 바다만 보고 살아가니 그게그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지요. 딸애가 떠난 방에 살림도 제법 빠져나가고 침대와 화장대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그앞에서 방문을 들여다보니 좀 뭔가가 허전하니 뭔가가 빠진듯한 느낌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애를 먹이고 살더니 이제는 다 커서 독립해나가니 빈둥지만 남아있는것같아 마음한구석이 뻥뚫린느낌으로 다가오는군요... 이제 무엇을 목표로 세우고 살아갈건지 아직 못정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런일을 위해서 앞만보고 달려왔는데 싶기도하고 마음이 심란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