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스탑 2010. 2. 8. 18:47

 


한동안 아들의 결혼식관계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제 좀 한가하게 생각해볼수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산다는것이 무엇인지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리 아둥바둥 살았나를 생각하게합니다.
그저 눈만 뜨면 새벽이 일어나서 고기(생선)실러나가고 
해만지면 집에 들어오고 한창 혈기가 왕성할때는 장거리 운행에 마치고 오면 
뒤풀이 소주한잔에 늘 그리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리 잘살지는 못한 인생이지만 술마실때만큼은 태호라면 모두들 마다않고 
다들 좋아했고 그러던 어느날 장기간 술을 좋아하고 쉬지않고 대음(大飮)로인해서 
심장이 커지고 심장에 무리가 오는병을 만나서 그만 그 좋아하는 술을 어느날부터 
끊을수밖에 없게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인기가 좋고 그누구도 다 좋아하는 둥글둥글한 그런사람이었는데 
심장에 이상이 와서 의사(심장전문의)술을 이상태로 계속마시면 죽는다고 
술을 끊으라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술 그리고 친구들이나 사람들이 모이면 마시는게 술인데 
이걸 끊게되면 모든 사람들과의 유대관계가 거의 한순간에 단절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에 부딫히니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죽는다는 그말에 가족을 생각하고 가정을 생각하고 우리집사람을 생각합니다.
아직 아이들도 고등학교 대학교이고 말입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란것이 느껴오면서 이리 허무하게 죽어선 않되겠다고 
머리를 스쳐갑니다..
호랑이는 태어나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태어나면 이름을 남겨야하는데 
설사 이름은 못남기더라도 우리 가정에 살림살이를 어렵게 해놓고 죽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것입니다.
일찌기 아버지가 (뇌졸중)중풍에 걸리셔서 없던 집안이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정의 희망이었던 50대에 그리 되셨으니 아이들은 놔두고서라도 
없는 살림에 그 중풍을 고쳐보실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고 그리하여 
집안에 돈이 될만한모든 물건들은 다 팔아서라도 약값과 치료비에 보탰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게 결국 길거리에 나앉게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3년이 좀 넘게 병중생활을 하시다가 결국은 세상을 뜨셨는데 
마지막에는 장례를 치를돈이 없어서 동사무소에서 적십자에 연락하셔서 
적십자의 작은 미니버스장의차가 아버지를 모시고 나 초등학교 6학년때 
그만 하늘나라로 가셨던것입니다.
그런 적십자의 혜택을 본 내가 올해는 적십자 회비를 납부했습니다만은 ..
작년에는 적십자가 미워서 적십자 회비도 납부하지 않았습니다.
혈액이 모자란다고 다른곳에서는 헌혈을 받아서 혈액공급을 소홀히 하고 일부러 
지연시켜서 혈액이 다른곳으로 돌아다니게 하여서 유통기한이 넘게만들어서 
그것을 알부민 만드는 제약사에 팔아서 이득을 취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좋은일을 해야하는 적십자가 피장사를 해서 자기네들 이권에 
이익을 보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저도 회비 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일단 올해는 그냥 내기로 했습니다..
나도 한때는 어려울때 도움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일단 그 당시에 온동네에 진빚을 어머니가 다 갚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내가 사는 동네에 한40년전에 쌀값외상이 시장에 쌀집에 있지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이런글을 쓰면 내가 잘아는 형님은 이제 슬픈이야기는 그만쓰고 좀 재미있고 감동깊고 좋은글을 써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저 역시 즐거웠던 기억이나 즐거운 추억을 불러내서 쓰고 싶지만 저의 어린기억속에는 즐거웠던 기억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즐거웠던 추억하면 서면의 부전동에 살때 우리집이 제일 잘살았던 기억같은데 그당시에도 아버지는 우유대리점을 지금의 대한극장 옆에서 운영하셨고 어머님은 같이 도우시고 했는데 그당시에 아버지가 온가족을 데리고 해수욕도갔습니다. 부산의 용당동에 있는 합판의 황제 강석진회장의 공장밑에 일본말로는 모래구찌라는 해수욕을 온가족이함께 간 기억과 송도에 어머님이 둘째형님이 있던 맹인(盲人)복지시설 라이트 하우스라고 그곳에 요즘 말하면 양과점 빵을 사서 보자기에 싸고 먹을것과 사이다를 사고 해서 소풍 비슷하게 간것이 즐거웠던 기억의 끝입니다. 그 당시에 해수욕을 많이 다니신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0살이 되기전에 나는 해수욕을 온가족과 한번 가봤고 어머니와 함께 형님보러 겸사겸사 해수욕을 본의 아니게 가본것이 나이가 50이 넘도록 저의 일생에 최대의 즐거웠던 기억같습니다. 심장병으로 술을 끊게 되었고 그로인해서 점점 술친구들은 멀어지고 내가 살아서 가정에 더 도움을 주기위해서 내가 건강해야한다는점이 제일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첫째로 멀리가던 장거리운행도 이제는 갈수가 없게 된것입니다. 주 수입원인 화물차 운전은 멀리가야 돈이되는데 ... 게을려져서 그런것이 아니고 잘 운전을 해가다가 그만 심장 펌프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기절을 하는정도였으니 시속100km으로 달리는차에 운전을 하고 가다가는 만약에 이런 사태가 오면 나하나쯤 가는것은 문제가 아닌데 내가 가고나면 그뒤에 실려있던 고기를 변상해야하고 뒷수습이 아주 어려운점이 많고 .. 또 나 때문에 다른 상대방을 잘못해서 같이 황천을 가는 경우가 생길수가 있어서 벌이는 좀 떨어지고 수입이 감소해도 멀리 가지않고 가까이 운행하면서 가정도 챙기고 나 자신도 챙길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놈은 게으른지 장거리 운행은 안하더라 먹고 살만 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실런가 몰라도 사실은 그게 아니란말씀입니다... 지금역시도 수입은 좋지않습니다만.... 이제 심장병도 근 9년째로 접어듭니다. 의사도 이제는 약을 한꺼번에 근 90일치씩 처방을 내립니다. 내가 꾸준히 약복용 잘하고 술을 끊은 결과라고 보야겠습니다. 술끊는 바람에 많은 술친구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녁에 술값으로 돈 한2만원만 쓰면 온동네가 즐겁던 시절이있었는데 .. 이제는 술을 끊고 마시고 싶으면 겨우 집에 있는 집사람이 마시던 포도주한잔이 내가 누릴수 있는 최고의 호사 입니다. 결국 마실수도 없지만 그래도 안토시아닌이 심장에 좋다고 붉은 포도주 한잔정도는 한달에 한두번 마십니다. 이번에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우리집 친척은 별로 없었지만 처가네 친척들은 많이 오셨고 또 내가 살기를 그동안 더럽게 살지는 않았는지 같은업종에계시는 축하객들이 많이 와주셔서 저 역시 너무 고마웠던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더 성실하고 더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도와주지않았으면 철이 덜 들어서 아직 술이나 퍼마시고 매일 늦게 들어오고 아직 집도 전세를 못벗어나고 그럴것인데 그래도 정말 좋고 고마운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집도 두채가 되고 아들 결혼도 시키고 돈도 남에게 아쉬운소리 안해가며 살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고마움 모두가 우리 집사람의 덕이고 아무탈없이 잘 커준 아들과 딸덕입니다. 정말로 하늘이 이런 마음을 알아준다면 더 우리집사람을 잘 되게 해주리라고 저는 바랍니다.. 저 때문에 어릴때 집을 나와서 이제는 우리집사람도 어느덧 50이 넘었습니다. 같이 이제는 인생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고 서로를 위해주는 나이가 되었기에 더 미안한 마음으로 더 건강하기를 바라고 더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살아온 세월에 이 모든것 살림이라든지 자식이라든지 모든것이 다 우리 아내의 덕으로 얹혀서 살은 나는 행복한 사람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