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렸을적 낙동강 하구언의 기억.

짬스탑 2009. 10. 31. 09:55

 

        을숙도 대교가 개통되어서 그 기념으로 한번 지나면서 전망대에서 명지쪽을 바라봤습니다.
나는 부산의 좌천동 산동네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이북 신의주 근처에서 피난내려온 월남가족이지요.
나의 사주팔자에 부산에서 살으라고 나와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릴때 좌천동 피난민들이 사는 산동네에서 근처에 무덤도 있고 하는 풀밭에서 
아버지가 양유(羊乳)목장을 하시면서 젖짜는 흰염소를 울타리속에 기르시며키우시는걸 보고 자랐습니다.
염소젖도 고소하고 상당히 맛이 있습니다.
어릴때 보니 새끼를 낳고 한5분이면 어린양이 일어나서 금방 폴짝거리며 걸어다니고 
젖이 더 잘나오라고 어미젖을 머리로 떠받아가면서 젖을 빱니다.
그런것을 보고 살다가 우연찮게 감천이란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감천에 오니 길도 좁고 온통 흙길이고 버스종점앞에 엄청나게큰 발전소라는것이 있고 
정말 무지무지 큰 굴뚝이 두개가 있었지요.
그리고 함석판넬로 된 발전소 건물에는 서로 손이 맞잡고 악수를 하는손이 그려진 그림이 있는  
그런 큰 입간판같은것이 판넬의 정면에 붙어있는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미국의원조와 웨스팅하우스의 기술로 지어진것이라는 것을 표시를 한것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국과 독일 기술자들도 많이 살았는데 ...
그 후 내가 들은 말로는 독일기술자에게 매일 주는 실장갑 한컬레도 집에가져가서 
부인이 빨아서 깨끗하게 씻어말려서 가방에 채곡채곡 챙겨서 독일갈때 다 가져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검소한 독일의 국민성을 보게되는 한 단면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 하고자하는것은 아니였는데 말입니다.
이야기가 다른길로 새어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감천 발전소 입구까지만 도로가 포장이 되어있었고 
그 위에 괴정나가는 길은 아직 도로포장이 덜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고개를 올라가면 장림과 괴정으로 나뉘는데 괴정에서 좌측으로 돌아서 가면 
103번 시내버스 종점이 있었습니다.
그 종점을 가기전에 고개가 있었는데 그 옛날에 바닷물이 그 고개밑에까지 들어와서 
그 고개밑에 물가에 배를 메어두었다고 전합니다.
그 고개가 지금의 신평 배고개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변해서 그 동네를 매립하고 그 진탕 뻘밭을 메우고 보수동과 충무동 
피난민 철거를 시작해서 신평장림 철거민 이주 사업의 일환으로 이주단지가 들어섭니다.
한집당 13평으로 게딱지  같이 다딱 다딱 붙은 집을 이어서 강제 이주를 합니다.
그 이상한 철거민촌을 벗어나면 바로 갯벌에 물이 들어오는 갈대숲이 바로앞입니다.
그곳에는 예전에 재첩이란 작은 민물조개가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재첩을 잡았고 
낙동강의 민물이 흘러오는것과 해질녁의 석양의 멋진 풍경과 가을에 갈대가 우는소리와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오는것을  늘 기억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 1980년쯤인가 장림신평의 갈대숲을 매립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내가 방위근무를 을숙도밑에있는 시온섬이라는곳에서 했습니다.
그 곳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 다대포에 갑첩이 출몰해서 장림과 다대포하단일원의 
낙동강 하구언쪽의 해안경계가 뚫리는 일이 벌어져서 아주 난리가 났더랬습니다.
밤에 비행기에서 조명탄이 터지고 아주 볼만했지요..
그런세월이 있었던 을숙도와 낙동강 하구언이었습니다.
방위를 받던 시절전까지는 낙동강을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우리집에서 걸어서도 얼마거리가 되지않는다는것을 말입니다.
어릴때는 걸어서 신평넘어서 낙동강 하구언을 알았고 그 곳을 걸어가면서 많은것을 배웠지요..
오늘 낙동강 하구언에 녹산으로 바로 들어가는 을숙도 대교가 어제개통했습니다.
그 곳을 집사람 출근 시킨후에 나혼자서 차를 몰고 을숙도대교를 한번 건너봤습니다.
아마 이달 말일까지 무료통행이라는것같은데 경치도 좋고 길도 아주 좋습니다.
지금 그냥 다니는 차량의 교통량을 조사해서 숫자를계산해서 통행요금을 산정한다고 합니다. 
이 다리가 생기면서 우리집에도 혜택이 있습니다.
제일먼저 우리 아들 출퇴근이 빨라져서 많이 여유가 생겼습니다.
항상 출근 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하구언 다리를 건너야되는데 차도 많이 막히고 
삥 둘러가던 거리며 시간이 많이 단축되게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이 다리를 한번 건너보니 종점이 ..
바로 부산시 자동차 등록사업소입구의 지하차도까지 바로 도착하네요.

 

갈대가 가을이라고 붉게 물들어가는 아침의 을숙도 하구입니다... 

 


단숨에 낙동강을 건너고 다리의 거리가 약3.5km정도 되는것으로 아는데 
정말 돌아가지않고 바로오니 편리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편리한 반면에 돈을 지불해야한다고 하니 그게 또 문제가 됩니다. 
다리의 중간지점에 차를 잠시 세워두고 전망을 볼수있는 공간이 조금있습니다.
밑쪽으로는 바다쪽이고 윗쪽으로는 하구언 대교쪽 명지쪽입니다.
예전에 형님이 살아계실때 하단 동산유지 공장옆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배로건너서 명지나 대동쪽으로 낚시를 다녔습니다.
그 강을 거슬러 배를 타는 기분도 좋았지만 갈대숲에 맑은 공기에 철새들이 아주 보기좋았습니다.
비교는 어렵겠지만 서울에는 이런 다리가 약12개가 넘는것으로 아는데 
부산에는 이런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가 이번개통으로 5개가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서울은 이동인구가 많으니까 다리도 많이 있어야하겠지만 
부산에도 이 강건너에 공단도 있고 김해도 있고 창원마산이 붙어나가는데 
다리가 몇개없어서 차들이 출퇴근 시간에는 아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불편한점을 돈을 좀 내더라도 차가 덜막히고 쾌적하게 갈수있다면 
모두 이 다리를 이용하지 싶습니다.
우리시민이 세금을 내는데 시발전이나 나라발전을 위해서 이 다리가 꼭 필요한데 
그동안 자연보호론자의 목소리에 많은 시민이 고통을 참고 다니다가 
이제야 다리가 개통되어서 쾌적하니 달리고 시간도 절약할수 있게되었습니다.
어릴때의 을숙도에 대한 추억과 기억은 대파밭의 밭고랑같이 넘어가고 갈대숲에 울어데는 
이름모를 철새는 이 다리로 해서 환경이 어찌 바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시온섬은 지금 지하철 종점의 기지창이 된지 오래고 세월이 가면 모든것이 바뀝니다..
다만 바뀌기 싫어하는 우리네 마음같이 추억속에서의 을숙도는 영원하지 싶습니다.
철새 도래지라고 써진 큰 팻말이 이제는 무색해졌지만..
가락타운이라는 아파트를 지을때만해도 전경과 김양식을 하던 어민과 대치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시온섬도 육지가 되고 그 맛있던 재첩국도 멸종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통통배로 잡아오던 웅어는 이제 그림책에서만 보게되고 ..
다 이게 시대의 흐름같습니다..
한가지가 좋아지면 다른한가지가 나빠지는것이 맞는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