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혼례식일짜의 확정.

짬스탑 2009. 8. 19. 10:15
 

 

 

 

 


어느덧 내 나이도 50이 넘었습니다. 
남들보다는 일찍살림을 한탓에 좋다면 좋고 아쉬웠다면 아쉬운 인생.
아이를 남들보다는 근 10년일찍 낳아서 길렀습니다. 
어렸을때 멋모르고 집사람과 일찍시작한 살림살이에 우리둘은 
남들도 다 그리사는줄알고 아무것도 없는 형편에 그냥 집사람의 퇴직금30만원으로 
보증금10만원에 월세2만원짜리삯월세 방얻고 조그만 살림사고 이불가지를 사고 해서 
남의집 문간방에서 조그만살림을 소꿉놀이하듯이 시작하게된것입니다. 
이미 그당시에 집사람과 아들이 출생을 했던터라서 우리 세식구는 그날그날 먹고 사는것이 
우리의 인생이었고 또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라는것이 즐거웠습니다.
아마 남들이 들으면 우스울란가 몰라도 그당시에 스무살도 않되었으니 
아직까지는 정신연령이 요즘 대학교 다니는 아이들 만큼 수준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집사람과 나는 일단 일은 저질러져있고 아이까지 있으니 아이를 잘키워야한다는생각에 
부지런히 적은돈이나마 않먹고 않입고 아껴서 조금 큰 전세방이라도 가기를 기원하면서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특히 지금에서 말이지만 우리집사람은 사랑하는가족들을 다 버리고 나만믿고 집을 나왔으니 
이게 잘되면 본전이고 잘 못되면 무조건 손해를 보는 입장이었지만 .. 
사랑에는 무조건이라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않고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것이란걸 
이제 나이가 들고서 그 어려운결정을 해준 집사람이 너무 고맙기만 합니다... 
일단 살아가면서 집사람은 부지런히 돈을 아껴쓰고 모으고 했건만 
남자의 세계에는 이상한 오락의 문화가 있어서 
도박이랄까 게임이라든지 아직은 그런곳에 신경을 써야될형편이 아님에도 
선배들이나 형들을따라서  그런 자리를 몰고 가는것입니다. 
나이가 어렸다고는 하나 나자신을 통제할만한 그런 능력이 부족했던것이지요. 
이런 꾐에 빠져서 조금씩 아깝게 모은돈을 할줄도 모르는 도박이란것을 형들 따라다니면서 
도박 그것을 꿈을 깨기까지 상당히많은 금전을 가져다 버렸습니다. 
할줄도 모르는것을 오기만 있어서 기고만장하였지요.
다 선배나 형들에게 배운것이지요. 
예전이나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트럭 기사대기실에는 일을 가는분과 
대기하는분들이 기다리면서 시간보내기가 적적하면 오락을 하는데 
통상하는 바둑과 장기 또 심심풀이 고스톱을 하는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당시에는 카드놀이는 보급이 덜되었고 화투노름이 많았는데 
짓고땡이라는 도박을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걸수있는 그런도박이 그 동네에 유행이었습니다. 
뭐, 여기서 도박의 유형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도박은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다 넣을수 있는 상당히 도박성이 큰 노름입니다. 
이것을 배우는 바람에 힘들게 집사람이 조금나은 집으로 이사할계획을 세워둔 돈을 
다른사람에게 빌리면서 나의 신용을 위해서 다 날리고 나중에는 적금을 든것까지 깨서 쓰고 
또 그런식으로 하다보니 일년에 적금통장만 한 5개정도를 날렸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매일하는것도 아니고 일년에 한두번 집에 돈이 모일만하면 이런노름판이 붙는겁니다. 
아마 우리집에 돈이 있는 시기를 아는것같았지요..
이것도 어느정도 세월이 가니 이런 노름에는 없는 사람은 어차피 지게 되어 있는것을 
깨닳는데 세월이 오래걸리지않았습니다.. 
근 한3년 이런식으로 살다가보니 우리집이 엉망이 된것을 느끼고 다시 마음고쳐먹고 
정상적으로 일부지런히 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는 이 노름과는 영 이별을 합니다. 
아이는 벌써커서 유치원마치고 이제 학교를 다닙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데도 부모가 나이가 어리다보니 교육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찌 할줄을 모르니 내마음대로 않되면 무조건 매를 들어서 다스리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은 어릴때 많이 저에게 맞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와의 기억에는 뭐 어떤것이 있냐고 물으면 
매일 매맞은 기억밖에 없다고 합니다....
나이가 어린부모이다보니 나 자신도 잘 못하면서 아들에게는 그런것은 엄하게 가르치다보니 
부모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은것은 사실입니다.
저의 잘못은 어찌하겠습니까....
일단 이렇게 힘들게 자란 일찍낳은 자식이 이제 어느덧 32살이되었습니다..
이제는 장가를 간다고 합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다닐적만 해도 우리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빨리 꿈에서 헤어나와서 정신을 차리는바람에
집사람이 적은돈에서도 않먹고 않쓰고 해서 모은 피와땀이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적에 
적지만 그래도 내 이름으로된 작은 아파트를 하나 장만합니다. 
그 당시에 주택융자를 주택은행에 받고나니 I,M,F가 터지는 바람에 약9%였던 융자금이자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더니만 13.8%까지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16.9%로까지 인상되었습니다.
그래도 연체한번 하지않고 부지런히 갚았습니다..
그 작은 아파트에서도 없는 살림이었지만 우리가족들이 재미있게 산것같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친구들과 3명이 아들방에서 놀고있는 모습을 봤는데 
17평짜리 우리아파트의 아들방에서 고등학생3명이 다리를 못펴고 앉아서 놀고 있는데 
너무 불편해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아 이래가지고는 않되겠구나..!
아이들이 발이라도 편히 뻗게끔 해줘야되겠구나 하는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당시에 또 내가 갑자기 심장병이 있는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로 살던 내집은 1층이라서 내가 추위를 타는 바람에 좀 따뜻하고 
해가 잘 드는집으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문제는 돈인데 이집 팔아봐야 5천만원도 안되는데 이것으로 해가 잘드는집은 어림판푼어치도 없습니다.
결국 주위사람들에게 싸고 해가 잘드는집을 알아보니 우리집에서 조금 더가면 길가 언덕에
해가 잘 드는 아파트가 있는데 시세가 1억이랍니다.
가진돈은 5천뿐인데 무슨수로 이사를 가나 하고 고민중에 같은 사무실에 있는 선배가 
부동산 경매에 눈이 좀 밝으신분이 있어서 그분의 조언으로 무작정 경매에 참석하게 됩니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것이라는 말처럼 내가 생각하던 아파트를 경매에 낙찰되어서 
큰 부담을 지지않고 그 아파트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싯가 1억짜리 아파트에 그당시에 7천6백몇십만원으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수리하고 주방하고 하니 돈이 제법들었습니다..
내 복에 이런 경매같은복은 있는가봅니다.
생전 처음해보는 볍원경매에 5명이 응찰해서 처음해보는 내가 낙찰이되니 감개무량하더군요.
경매법관이 내이름을 호명하는데 침이 꿀꺽넘어가던데요.,..ㅎㅎ
경쟁자를 물리치고 새집으로 오면서 전주인과 좋게 끝나고 나오니 
주위분들이 잘 살아서 그런것이라고하니저도기분좋고 뒤끝이 깨끗하게 마무리가 잘되었습니다. 
아들도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교도 졸업하고 집에서 한달 가량 입사원서 넣는다고 다니고 하더니 
졸업후 한달 보름쯤에 조그만 비행기 부품회사에 취직이 되었다고 합니다.
연봉은 작지만 처음부터 많이 주는곳도없고 또 지방이나 멀리가서 살면 그 돈으로는 
집에왔다갔다 경비로 다 들어가니 집과 가까운곳을 다니라고 내가 늘 이야기한것이 
아들도 그랫는지 경기도쪽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부산의 녹산 공단에 취업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입사를하니 집에서 그 회사까지 거리가 딱20km인데 버스도 자주 않다니고 해서 
차가 없어서는 않되겠기에 작은 소형차를 한대사야만했습니다.
말단이되다보니 작업량은 많고 아는게 많이 없다보니 늘 야근이고 그렇습니다.
결국 집에서 다니면 잠을 잘 시간이 없어서 기숙사에서 3년간 먹고자고 토요일에퇴근하면서 
빨래를 챙겨오고 월요일아침에 출근하는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일단 아들이 돈을 벌게되니 자기앞으로 제일먼저 종신보험과 운전자보험을 넣게하고 
그리고는 이제 아들이 장가갈 나이가 되다보니 결혼준비를해야겠기에 
또 집을 하나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동안 부지런히 모은돈으로 우리아파트 같은동에  옆라인에 아파트를 하나 물색해서 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하나 구입해서 아들명의로 사놓고는 우리가 좀 돈을 내고 나머지는 
아들이 월급타서 부금을 넣는 형식으로 3천만원을 갚아나갔습니다.
그 동안 아들은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월급 좀 타면 카드회사에서 다 빼가고 보험이고 적금이고 넣다보니 돈이 없었서 
늘 허덕거리면서 살았던것이지요.....
이제 지난 6월달에 모든것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아들이 독립할 시기가 된것같습니다...
저와 같은 사무실에 계시는분이 우리집사람의 성실함에 반해서 아들은 얼굴도 보지않고 
먼조카딸을 그냥 소개해주셨는데 둘이 만나더니 그렇게 좋아하는 사이로 급속도로 
관계가 진전되더라구요.
아무래도 사람에게는 인연이 있는것같습니다.
구룡포에 본가를 두고있는 안(安)씨네 처녀인데 셋째딸이라고 합니다.
아직 직장은 없는 처녀이고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하고 늘 적은 점수로 떨어지는바람에
억울하고 안타까워서 계속공부중인 처녀입니다.
이번 2학기에는 임시교원으로 우리집근처에 근무지를 받았다고는 하는데...
일단 둘이만 좋다면은 그냥 혼인를 하게할 작정입니다.
지지난주에 사성(四性)을 보냈는데 어제저녁에 아들에게 혼례식 날짜를 잡았다고 통보가 왔습니다.
아직 예식장은 스케줄을 맞춰서 돌아다녀봐야 알겠고 일단 날짜만 나왔다고  
아들편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날짜는 내년 1월 17일이라고 합니다..
달력을 보니 1월셋째주일인데 다른분들의 불편함이 없어야하는데 걱정입니다.
이제부터 저도 할일이 더 많아 집니다.
일단 현재아들집에 사시는 세입자를 늦어도 11월말일까지는 사람을 내보내야합니다.
그래야 12월부터 집수리에 들어가서 가구며 주방이며 여러가지살림살이를 
준비할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하는데 이게 말만큼 쉬운일은 아닙니다.
한고개를 넘으면 한고개가 또 나오고 한고개 넘어 또 고개입니다.
이것이 인생살이인가봅니다....
인생은 많이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벌써 내가 아들을 혼례를 시킬 나이가 되었다는점에서 보니
이제 걸어온길이 제법 되었구나 싶습니다..
이고개를 넘으면 또 어떤 고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