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설이 다가오면.

짬스탑 2008. 2. 6. 12:26

 설 앞 추운 겨울 바람앞의 자갈치바닷가에서 소주를 즐기는 분들.


설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늘 해마다 나이는 한살씩 더먹고 지금까지는 나이라는 개념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설 명절전부터 직업의 특수성으로 일주일 쉬는 휴가를 받았는데 
뭔가를 해보든지 놀러를 가야하든지 해야되는데 이런 휴가같은걸 
경험해본적이 없으니 시간을 조리 있게 쓰는법을 모릅니다.
남들은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나이트라는곳도 가고 또 어떤 친구는 
카바레라는 곳에가서 사교춤추는데 도끼자루 썩히고 재미보는데 
좋은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저는 뭐 할줄 아는게 없어서 아침에 자고 나면 집사람 출근시키고 
낮에 텔레비젼이나 좀 보다 컴을 좀 하면 저녁에 와이프 태워서 
퇴근시키고 이런날의 반복연속입니다.
어릴때의 설 명절 밑은 골목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며 용돈으로 받은돈으로 
폭음탄과 불꽃놀이를 한다고 아이들 끼리 몰려나가서 추운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놀던 때가 기억속에 생생한데,,
이제는 내 나이가 벌써 나이 50을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맘때 같으면 동네의 형아니면 우리 형제들과 없는 돈이지만 목욕탕도 함께 
가는때였을것이고 돈이 모자란  어린시절에는 큰 솥에 물을 데워서 
엄마가 큰 고무 다라이에 나를 담구고 국수가락 같이 밀리는 때를 엄청쎈 이태리 
타올로 심하게 빡 빡 밀어서 살결이 벌�게 되도록 목간을 하는시간이었을것입니다.
그리고는 없는 살림에도 담궈둔 가레떡뽑을쌀을 누나와 저에게 주시며 
방앗간에 가서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게 하고서는 
어머니는 다는 음식준비로 바쁘실때 입니다. 
방앗간을 달려갑니다.
벌써 수많은 아이들이 방앗간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여기서 만나면 또 즐겁고 반갑습니다.
누나는 누나의 친구들이 오고 저는 저대로 제 친구들이 같이 모이니 
다들 또 놀이 마당을 만드는것입니다.
어쩌다가 돈이 생기는 날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쓸떼 없는 구슬이나 딱지같은것을 사서 지금까지 남의 것들만 보던것들을  
내것으로 만들어서 나도 가지고 있다는 동질감과포만감을 맛봅니다.
떡방앗간의 줄은 왜이리 더딘지 모르겠습니다.
누나를 한시간 맡겨놓고 놀고와도 줄이 조금밖에 줄지 않았습니다.
딱총도 사고 화약놀이할 화약도 사고 재미있는 장남감을 오늘이 아니면 
언감생심 만져보지도 못할것을 한번 호기를 부려봐서 삽니다.
동네 골목마다 따콩 따콩 따총 소리가 나고 곳곳에 폭음탄 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이윽고 밤이 깊어서야 가레떡이 다 되었습니다.
이 떡을 빨리 집에가서 찬곳에 펼쳐놓아서 식혀야됩니다.
그래야 가레떡국을 끓일수있게 썰어야 하니 말입니다.
떡국은 언제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1년에 한번 설 때마다 먹으니 맛이 없을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떡 방앗간에  간 사이에 어머는 두부를 깨어서 삼베 보자기에 싸서 비틀어
만두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지금이야 마트에 가면 널린게 만두이지만 어릴때는 만두만들려면 아주 굉장했습니다.
먼저 두부를 으개야합니다.
두부의물기를 제거 할려고 물동이에 물을 가뜩차운다음 
그 부두를 싼삼베주머니속에 넣고 위에 물동이를 놓습니다.
그려면 수분이 어느정도 제거되지요.
돼지고기를 썰어서 잘게 만든다음 신김치를 씻어서 참기름후추로으로 
무쳐서 칼로 아주 잘게 썰어서 만두소를 만듭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북 신의주 옆의 선천군에서 내려오신분이라서 
이런 만두를 꼭 겨울이면 항상 해먹습니다.
한번 만들면 약 50여개를 만들었던같습니다.
만두를 온 가족이 만드는데 나 나 형제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만듭니다.
나는 엄청나게 큰 만두를 만들고 누나는 예쁘고 탐스럼게 엄마는 
언제나 같은 모양으러 반달같이 만드는데 동생이나 나는 이상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내가 먹을 것이니 아무도 손데지 말라고 이야기 해둡니다.
우리집은 여름에는 우리엄마가 피곤하신데도 아버지 몸이 좋다고 
북쪽지방의 특별식개장국을 솥에 달아놓고 끓여드셨던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북쪽에서 많이 담는 탁 쏘는듯한 국물맛이 일품인 동치미 김치 
아무리 없이 살아도 무우와 소금만 있으면되니 큰돈들이지 않고 
늘 해 먹었습니다. 보리밥에 동치미 김치국물에 많이 밥말아 먹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북 사람이다보니 집에 관습같은것이 북쪽의 것을 많이 따랐던것 같습니다.
내기억에는 아마 우리집에는 차례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북쪽에서 넘어오신지가 20년이 않넘었으니 아마 살아계신다고 
생각하셔서 그랬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래도 피난오셔서 모두 정착을 하셔서 근처에 친척분들이 계셨던것 같습니다.
아침에 씻고나서 없는 돈으로 아이들 설을 챙겨주십니다. 
새운동화며 새옷 그리고 세배를 하면서 덕담은 둘째 치고 세뱃돈에 더 욕심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세배돈을 주시니 그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일단 아침을 떡국으로 맛있게 먹고 아버지와 육촌되시던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갑니다.
평안도 사투리가 구수한 할머니 가 우리를 반깁니다.
할아버지는 예전에 동래경찰서장 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 모으는 법을 몰라서 찢어지게 가난한 부산진역앞의 
산동네 피난민촌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계십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것이 옳은것인지 판단을 잘 못하겠습니다.만...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꼭대기 동네에 삽니다.
이제는 서면에 그 할아버지의 형제분들이 두분더 계십니다.
6.25때 우리 아버지가 다 모시고 내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두분다 서면에서 페인트 가게를 하시면서 그런데로 잘 사시는것으로 압니다.
어린마음에 엄마와 손잡고 그런데 인사가고 세배하면 돈을 준다는것 때문에 
자주 갔었습니다.친척이란 동질감도 그런 명절 때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면을 한바퀴 돌고 나면 일단의 친척집 세배순례는 끝나고 
근처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고 날은 추운데 놀기 바빠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놀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 아버지가 중풍으로 드러누우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 아는데가 있습니까 친척이 있습니까..
엄마가 여러곳을 도움을 청해도 아버님의 친척분들은 모두 
돕는 시늉만하시다 결국 끝에가서는 경제적인 도움을 줄수 없다고 하셨고 
우리가 오면 모두 싫어하는 내색을 나이가 어린 우리도 아는지라 
저절로 발길이 끊어지고 왕래가 중단 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커서 한번 찾아볼려니 부산진역앞동네의 할아버지네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셨고  서면에 살던 한 가족은 사업에 실패를 해서 이사간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찾을길이 없고  부산진 경찰서 뒤에서 여관업을 하시던 가족은 
김해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외에는 들은것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쁘면 친척도 형제도 모두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다는것을 
어린 나이에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밥이나 굶지 않고 살고는 있습니다만 ..
이런 명절이 되면 근처에 친척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많이 생각합니다.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친척이라야 돌아가신 형님집이 유일합니다.
설날 부모님들 차례상이나 잘 차려서 아이들과 떡국 한그릇하면서 
옛날을 곱씹게 되는데 그래도 미우나 따나 친척이 있었으면 합니다.
세배돈 탈 나이도 지났는데 말입니다.....


설전에 큰선박의 앵커줄 실러갔다가 너무 무게가 많이 나가서못실고 돌아오면서 선박 브릿지 만드는 모습입니다. 우리동네끝에 있는 구평방파제앞에서 100년의 약속.....김연숙......디스코 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