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첫 사랑.

짬스탑 2008. 1. 12. 16:51




사람마다 누구나 첫사랑은 있기마련이다. 누구나 추억속에 아름답지않은 첫사랑이야 있겠냐만은. 지금하는 이야기는 나의 첫사랑의 이야기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3년전에 한 16살 먹은 못 배우고 작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애의 집은 하루하루 벌어먹기도 급급한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서 가족들과 부양을 책임지는 그런상황에 있었지만 언제나 좋은날이 올거라는 기대감속에 늘 밝게 살기만을 생각하면서 아무 느낌 없이 살았습니다. 가정이 어려워서 그러던 가운데 부산의 범일동에 있는 양정모씨의 부친이 세운 국제고무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의 국제상사입니다. 그 당시에도 만18세 미만은 노동법에 따라서 미성년취업이 금지되던시기입니다. 그러나 부모동의서가 있으면 그 서류로 일단 임시직으로 나이가 찰때 까지 취업을 하게 되는것이지요.. 못먹어서 눈만 땡그러니 크고 별로 볼폼없는 그 당시로 말하면 그냥 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소년이 일단 취직을 해서 일을 시키니 모든것이 이해가 빠르고 남보다 손이빨라서 나이가 좀 있는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시키면 무엇이든 잘 해냅니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 가운데 사랑을 받고 이제 일머리를 알아가려든때가 입사해서 1년정도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알고 어리니 귀엽게 봐주고 여러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이제는 제법 많이 익숙해지고 주위를 볼수 있는 눈이 떠지는것입니다. 그 당시는 다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서 내 또래의 남자들도 있고 내 또래의 여자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내 가정이 형편이 어려우니 다른 아이들이 놀러갈때도 나는 늘 제외 되었습니다. 이유는 늘 돈이 없었기에 말입니다. 한 일년을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내가 하는 일은 "다이싱"(일본말)이라고 제화부에 맨처음에 신발틀 금형에 재봉부에서 갑피라고 신발위의 덮개를 만들어오면 그 것을 금형에 씌워서 바닥을 붙이고(이 일은 쯔리꾸미라고 합니다.) 콘베어 벨트를 타고 내려오면 옆꾸리라고 공정을 하는데 양옆을 감싸서 모양을 만드는것입니다. 그래서 옆꾸리를 해서 다시 콘베어를 타고 내 앞에 신발 모형에 오면 신발의 코사개와 뒷굽 모양을 다이싱 기계로 만들어내는것입니다. 이게 구두 같으면 신발 집게로 일일이 못을 쳐서 구두코와 뒷굽 모양을 내는것으로 신발공장에서는 아주 중요한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아주 잘 했습니다. 작업이 위에서 신발이 콘베어를 타고 쭉 내려오니 어디 화장실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고 콘베어가 꺼지는 휴식시간만 갈수 있을정도 입니다. 그러면 우리밑에는 본드 칠을 하는 여자분들이 본드를 칠하고 그 밑에서는 밑창에 풀칠과 다음단계는 신발모양과 밑창의 결합을 거치면 그 신발의 창과 갑피를 양옆에 풀칠해서 고무테프를 붙여서 완성이 됩니다. 완성이 된것을 검사관이 일일이 검사를 해서 가류 구루마에걸게 됩니다. 이 완성된 신발들을 가류 증기가마에 넣고 아주 고온 고압으로 약한시간정도 가류(증기압)를 해서 찌게 됩니다. 수많은 공정을 거치고 그렇게 해서 신발이 완성됩니다. 신발을 가류가마에서 증기압으로 쪄내면 다시 검사과로 콘베어벨트를 타고 신발이 이동 되는데 그곳에서 마지막 검사후 포장 작업후 출하가 됩니다. 나는 다이싱이라고 신발의 코싸게와 뒷굽(지금시대에는 토라스트와 힐라스트라고 하는데)을 만드는 공정입니다. 우리 집사람은 바로 내 위에 있는 옆꾸리를 봤습니다. 제화부에서 돈을 제일 많이 주는 부문이 바로 쯔리구미와 옆꾸리 그리고 다이싱입니다. 이 세 파트가 조금만 잘못하면 신발의 모양이 틀어져버리고 불량이 나기에 아주 숙련공아니면 이런 자리는 올라가지도 못합니다. 아마 그때나 지금이나 급료는 시급을 주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도 시간단 3500원선이상인데 그 당시에는 아마 백원단위정도 받았던것 같습니다. 신발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나이가 어려서 여자라는것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어느덧 17살이되고부터 문득 다가오는 여자애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어려운 가정에 힘이 되어보겠다고 벌러나온 그 시대의 힘인 여공들입니다. 더우기 나는 나의 첫사랑과는 업무적인관점에서 협조를 않할수 없는 그런 가까운 사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다가 왔습니다. 그 때 아마 나는 감천에 산꼭대기에 살았던것으로 기억됩니다. 새벽에 17번 버스를 타고 졸면서 출근하고 7시에 회사범일동에 도착해야하니 그리고는 저녁에는 한푼 더 받을려고 그 얼마되지 않는 돈을 더 벌려고 잔업지원을 해가면서 9시 넘게 마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이제는 햇수도 한2년되고 하니 이런장난 저런 장난을 다 받아주는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집은 우암동 뱃머리이고 나는 감천 산꼴짝인데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어느날 부터 둘이는 잔업도 함께 하게 되었고 늦게 같이 마치면 그녀는 집에 잔업하고 간다고 보고하고 나와 둘이서 부산역까지 걸으며 어린나이에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그렇게 걷다가보면 부산역이 너무 짧아져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걸었습니다. 어떨때는 이야기에 서로 좋아서 영도 다리있는곳 까지도 걸었으니 말입니다. 왜 걸으면서 어린나이에 데이트를 했냐고 하면 둘다 돈이 없었기에 말입니다. 그녀는 집에 봉투째로 아버지에게 갖다주고 용돈을 타쓰는 형편이었으니 돈이 있을리가 만무였지요. 나 역시도 누나가 아프고 우리집 살림살이가 엉망인상태이니 내가 쓸돈은 없는것입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옥녀봉 샘밑에 판자집을 짓고 살던 시절이라서 그 어떤 엄두도 못내던 시절입니다. 다른곳에 전세방 아니 삯월세라도 들어갈라치면 결핵에 걸린누나때문에 셋방을 주는 주인이 없었습니다. 지독한 가난에 진절머리치는 생활을 하고 살았던 때입니다. 돈이 없는 어린 연인들이 기껏 데이트라는것이 걸어서 하루는 서면쪽으로 하루는 시청쪽으로 이런식으로 버스비만 있으면 집에 갈수 있는 시간 까지 걸으면서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감정을 표현할뿐이지요. 그러다 손을 잡게 되고 그러면 가슴이 뛰고 콩당거림과 숨막힘 이런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느껴보는 그런 감정들이었습니다. 어느덧 이렇게 교제한지도 한6개월이 넘었고 내가 어떤사람이고 어떻게 사는지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하기에 우리 어머니에게 여자가 하나 있는데 집에 인사 시키러 오면 되겠는지를 물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뭐 나이도 어리고 하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고 그랬는지 한번 데리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 길로 다음일요일에 우리집을 한번 방문하게 되고 인사를 나누면서 두번정도 와서 놀다가 가게 되었는데 내가 그만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던것입니다. 어찌할수가있습니까.... 그녀도 외박을 했으니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불호령이 내릴것은 뻔한 이치이고 겁도 나고 해서 그때부터 우리집에서 저와 함께 살게 된것입니다. 꼭 나만 그런것이 아니라 우리집사람도 은근히 바란것이 아닐진지는 아직도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남자는 솔직히 책임을 질때는 확실하게 책임을 져야한다고 항상 생각하는 저 입니다. 그래서 일단 같이 살면서 한 직장을 다니니 정말 좋았습니다. 늘 붙어다닐수도 있고 늘 함깨 하니 항상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집사람은 약간의 고통이 따랐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찾아나선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의 도피이지만 부모로서는 이게 아니란것이지요. 저도 이 사실을 알지만 제가 가진것이 없는데 뭘어떻게 해줄수가 없었습니다. 집사람도 용케 피해다니면서 직장으로 찾으로도 오고 했는데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남여가 만나면 임신이 되고 결국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 나이가 그때가 18살입니다. 이제 큰일났습니다.! 이제 아이도 생긴다니 먹고 살길이 막막합니다. 신발공장에서 멋지게 여자는 하나 꼬셔서 같이 살림은 차렸건만 아이는 곧 나온다고 하는데 이렇게 벌어서는 둘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판에 아이 까지 생기고 또 어머니와 함께 살려니 더 어려워집니다. 아이는 낳았습니다... 아들입니다. 일단 아이는 낳았는데 먹고 사는게 막막합니다. 그리고 우리집사람은 첫사랑으로 연결되어서 어린나이에 아이를 낳다보니 젖꼭지가 발달이 덜 되어서 젖을 먹이지 못하고 비싼 남양분유를 사 먹여야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를 내칩니다....이제 나이도 있고 독립할때가 �다는것입니다. 집사람의 퇴직금으로 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나일론 솜으로 된 이불 하나와 숟가락두개를 주고 우리는 나와서 30만원에 2만원짜리 삯월세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중고 삼성 이코노 흑백텔레비젼을 2만원주고 하나 사고요. 텔레비젼을 올려놓을 사과궤짝같은 옷장을 하나 샀습니다. 그 날저녁에 아이와 셋이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지금부터 잘 살아보자고요... 이제부터는 달콤한 첫사랑이 아니라 삶의 악전고투 연속입니다. 책임지려했던 사랑이 이렇게 힘들게 일을 벌려놓았으니 이젠 죽으나 사나 같이 가야합니다. 집사람도 집에서 부업을 하고 저도 이렇게 신발공장에서 번돈으로가족들 부양이 않되니 이제 기술쪽과 금전이 더 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야 했기에 다른일자리를 알아봐야했습니다. 그 당시에 트럭사업이 경기가 좋았습니다. 그 곳에는 내 형님이 계셨는데 놀기만 좋아하고 돈과는 인연이 없는분이라서 이틀치 양식만 있으면 전축 틀어놓고 음악듣는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산공동어시장에 생선을 실어나르는 화물차의 기사가 되기위해서 조수 생활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조수 첫월급은 아마 먹여주고 한5천원정도 받은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럭저럭 한 1년해서 기사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자리를 옮겨서 감천의 동일아파트 자리에 있던 대성식품이라고 베이킹 파우더 만드는 회사에 기사로 취직을 합니다. 월급도 제법 받게 될즘에 방위소집영장이 나옵니다......엎친데 덮친격입니다. 우리집에서 내가 않벌면누가 돈벌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모아둔돈 한이백만원은 안 까먹을려고 집사람이 아이를 맡기도 화장품 외판원을 시작합니다. 그러는동안 나도 일요일만 되면 쉬지않고 부두에 나가서 스페어 기사를하고 하면서 방위 14개월근무를 끝냈습니다. 다시 집사람은 아이가 들어서고 내가 방위를 소집해제를 할때쯤 우리 딸이 태어납니다. 다시 우리가정을 내가 부지런히 해서 먹고 살아가고 조금씩 저축을 해나갑니다. 이제는 장인도 아이가 둘이니 모든것을 용서해주시고 결혼식까지 올려주시고 자주 왕래를 할것을 당부 하십니다. 우리 집사람의 억척같은 인생역정에 아무리 힘들어도 첫사랑을 책임지려는 그 마음에는 서로가 변함이 없기에 빈손으로 만나서 힘들게 살았어도 지금도 힘들게 살아도 사랑만은 언제나 변치않는 그런 첫사랑입니다. 나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그 녀의 손을 잡을때 떨리는 가슴을 지금도 잊지못합니다. 항상 초심을 가지고 책임지는 사랑을 하면서 이 가정을 항상 밝고 환하게 서로 지켜나갈것입니다.. 남들은 첫사랑은 잘 이루어 지지않는다는 그런 속설을 믿는것 같은데 첫사랑은 미숙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해서 서로 겁을 내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첫사랑도 책임지는 마음의 자세만 있으면 영원할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사랑...항상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책임이 크고 무거운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