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동창회 가을 야유회.
짬스탑
2007. 10. 27. 21:45
꼭 1년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내일 동창회 야유회를 갑니다.. 얼마 다녀보지도 못한 학교라는것이 그 동안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고 무슨 재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죽자살자 앞만보고 죽지않으려고 부지런히 달려왔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보다 번듯한 살림을 이루어놓은것도 없고 그냥 오로지 죽지않으려고 살아왔다는것이 정답인것같습니다... 초등학교다닐때 부전동에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부전초등학교라는곳에서 초등학교입학이란것을 해봤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커다란 롯데 호텔이 들어서서 아주 문화의 중심가가 되었지만 어린 그 시절은 아버지가 우유대리점을 하시며 대한극장옆에서 제법 크게 장사를 하시던 시절입니다. 그러던것도 잠시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되자 가세가 기울었는지 무슨연유에서 감천으로 이사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송도윗길을 버스가 꼬불꼬불돌아서 송도 해수욕장을 지나서 감천고개를 넘어서 좁은 길을 넘어서 감천종점에 도착합니다. 바로 길건너 옆에는 파출소가 자리잡고 그 앞에는 중국집이 있던 사거리였습니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지금의 감천 사거리쪽에서 1동 사무소 앞의 공터에 버스 종점인데 앞에는 큰 발전소에 악수하는 미국과 한국의 손그림이 크게 그려진 건물이 자리잡고 있고 뒤에는 작은 대나무숲이 우거진 울타리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은 금붕어 양식장으로 논같이 생긴곳에 금붕어를 아주 많이 길렀던곳으로 생각납니다. 그 위에는 산쪽으로 길이 쭉 뻗어있는데 파출소뒤에는 고아원도 있고 그 위에 지금의 시장자리에도 고아원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도 나이가 어려서 무슨연유로 감천이란 시골로 들어온지 몰랐습니다. 그냥 어린아이가 부모들의 의사에 따라 이사를 온것일뿐 아무것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구감이란곳인것같은데 ... 바로 옆에는 임금무덤만큼 큰 묘가 있고 잔디를 예쁘게 깍아놓고 관리인이 사택에 사는것같은집조금 위쪽의 길옆집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 집도 큰방쪽은 아마 초가집 같았는데 제 기억이 아마 맞을것입니다. 우리는 건너방쪽 무화가 나무 있는쪽의 쪽방을 아마 삯월세로 이사를 온것 같습니다. 일단 이사를 했으니 전학이란것이 되어야 배울것이 아닙니까.. 어차피 국민의 4대의무중에 교육의 의무가 있으니 말입니다. 부산진역앞의 산꼭대기지만 그 동네에서 살다가 부전동에서 제법 수도꼭지 빨다가 온놈인데 이런 깡촌에 오니 기가 막힙니다. 내가 어찌할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단 2학년에 전학을 와서 바다가 보이는 입구쪽의 맨첫번째 교실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그곳이 몇반인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학교앞에는 바다가 있고 정문앞에는 탁주 만드는 양조장이 있고 그 바로 앞에 마을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큰샘이 있었습니다.. 전학을 바로 와서는 그래도 도심한가운데서 온지라 제법 이동네보다는 수준이 높아서 공부도 꽤나 잘했던것같은데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앞의 학교는 대포만이라 불렀고 뒤쪽의 높은산은 천마산이라고 하더군요. 학교의 매주 월요일 조례를 할때마다 부르는 교가에 그리 나옵니다.. 그 곳에서와서도 가세가 더욱 기웁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자갈치 난전에서 우유 포장마차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다방이나 그런곳에 우유 납품도 하고 소매도 하고 그랬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사를 합니다. 다시 감천1동 고아원뒷쪽에 염소 목장을 하는 집에 방하나 부엌하나 있는 그런집에 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오래 살지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위쪽에 블록을 벽돌을 찌는 공장옆의 일본식 건물을 개조한집에 다시 이사를 합니다. 도대체 이사를 너무 자주 해서 아침에 학교갔다오면 이사간 집을 찾아야 하는 그런 우스운 풍경도 벌어졌습니다. 형편이 이지경이다 보니 학교의 기성회비인들 제대로 내겠습니까... 학교에서 아주 기성회비 못내고 애먹이는 아이들을 선생님이 수업을않시키고 애들을 집으로 회비독촉해서 �아보냅니다.. 집에 가본들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돈이 있으면 진작에 내지 그것 기성회비 얼마한다고 않내겠습니까... 결국 아무도 없는 집에 돈못내는 아이들과 우루루 몰려왔다가 어느정도 놀다가 다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고 옵니다. 원체 없으니 미안한 감정같은것도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습니다..... 어느덧 5학년을 감천초등학교에서 보내고 있던 봄이었던같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형편에 가장이 중풍으로 쓰러져서 누워버렸으니 이제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될지 모릅니다. 엄마는 가진돈도 없고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어버렸고 나는 아버지 침 잘놓는다는 사람따라 아미초등학교밑에중풍약(한약) 받으로 어린마음에 아버지 빨리 낫게 하려는 마음이 앞섯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방세 걸린목돈을 아버지 병구완할돈으로 쓰기위해서 다시 집을 옮깁니다. 이번에 얻어간 집은 처음에는 아무말않더니 아버지를 보고서는 다시 방을 세를 못놓겠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짐도 풀지 못하고 또 이사갈 집을 구하러 다니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여곡절끝에 또 집을 얻어놓고 또 얼마있으니 주인이 방을 비워 달라고 합니다. 그 해에 1년에 이사를 6번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학년부터 5학년말까지 만 4년을 감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도저히 감천에서는 살수 없다고 판단이 서신 엄마는 다시 원 본적지인 좌천동으로 이사를 가자고 해서 좌천동 산 꼭대기에 다시 방을 얻었습니다.. 그때 우리집 큰형이 가출을 했다가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다시 전학을 해서 나는 수정초등학교에 5학년을 다니게 됩니다. 그러던중에 좌천동 에는 좌천초등학교가 없어서 6학년때에 개학을 하여 다시 학교가 만들어져서 좌천초등학교로 편입됩니다.. 그러던중에 학교에 얼마다니지도 못하고 그만 생업을 위해서 금세공을 하는 가내공업에 귀금속 가공기술 을 배우고 살림을 돕기위해서 학업을 중단하게됩니다. 그러다보니 학교 졸업도 못하게 되고 저의 기록은 공중에 뜨게 됩니다. 중학교는 꿈도 못꾸게 된것입니다. 먹고 살아남기위해서 아버지의 간병과 그 비용으로 없는 집이 아주 폭삭 망해버렸습니다. 그렇게 학교와 담을 쌓고 생활전선에 뛰다보니 졸업장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 후 어느날 친구들이 와서 학교에서 선생님이 한번 보잔다고 해서 시간을 내서 갔더니 초등학교는 의무 교육이라서 6학년도 조금만 다녀도 의무 교육이라서 졸업장이 나온다고 하면서 졸업장을 주시면서 부지런히 잘 살아라고 하시더군요. 이게 나의 학교생활이 전부 입니다.. 그 뒤에 범일동에 철길옆에 있는 국제(고무)상사에 취직해서 공원으로 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누나와 나는 신발공장에서 벌어서 가족이 먹고 살았는데 누나가 못먹어서 몸이 약한데다가 공기가 나쁜 신발공장 봉재반에서 결핵에 걸려서 그만 또 집에 환자가 생깁니다. 또 살림이 엉망진창으로 떨어집니다. 이제는 다시 또 감천으로 이사를 해서 들어갑니다.. 지금의 옥녀봉 샘밑에 천막 판자집을 짓고 전기도 안들어오는곳에서 석유 호롱불을 켜고 그래도 가족이 모여살면서 누나의 간병치료를 해볼려고 했습니다. 그리 살다가 돈을 조금 모아서 누나는 진영의 결핵 요양원으로 보내고 우리는 감천2동 2통인가 5통인가 회관밑에 방을 얻어서 독립합니다.. 그러다 방위(병역) 소집을 당합니다.. 우리 가정이 이제 살길이 막막해지는것입니다. 내가 벌어야 먹고 사는데 어린아들과 집사람이 어찌 살겠습니까... 그 때 우리 감천에 동기들도 군대 간사람은 가고 방위를 받던 사람들은 비슷한 시기에 다 같이 병역의무를 받게 된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병역의무도 끝나고 예비군 훈련을 신평에가거나 감천에서 예비군훈련때 얼굴이 낮이 익은 친구들도 보이는 겁니다. 그게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5학년때 까지 얼굴을 보고 사귄친구들이지요.. 원진이, 영호, 그외 제법 얼굴을 알만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내가 감천초등을 졸업하지 않았기에 동문이나 동창생이라고는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어떤 사람은 저를 알아도 보고 더러는 모르기도 하고 내가 베드로도 아닌데 부인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제가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마쳤으니 말입니다. 작년 오늘 평소에 그냥 얼굴만 알고 지내고 있던 영호가 동창회 총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내가 어려울때 도움받은집에 명태 한상자를 갖다주러갔는데 그 앞에서 영호가 나는 본것입니다. 나는 반갑다고 인사만 했는데 영호는 내일 자기들 동창야유회가 있는데 꼭 참석하라고 합니다. 나는 이 학교 졸업생도 아닌데 그게 되겠느냐고 했더니 모든것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 하겠다고 일단 참석만 하라고 합니다. 참으로 쑥쓰러운 일입니다... 같이 공부는 했지만 그리고 나의 하교생활중에 제일 긴 시간인 4년을 함깨 수학한 친구들이 다 이애해줄것이라고 하면서 영호가 너무나 권하기에 일단 다음날 참석했습니다.. 아침에 와서 보니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는데 여자애들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근 35년만에 보는 얼굴이니 오죽하겠습니까.... 달리는 버스 속에서 총무가 나를 소개를 합니다.. 참으로 긴 시간 35년이란 세월을 돌아서 오게된 내가 동창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드디어 나에게도 동창이란단체의 사람들이 생긴것입니다. 같이 공부하고 뛰놀던 어린시절의 아이들이 어느덧 중년이 되어서 이제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처음 동창회라는것을 한다는것이 얼마나 쑥쓰러웠던 것인지..... 이제 그런 시간이 딱 1년이 흘렸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또 동창회에서 가을 야유회를 가게되었습니다. 근 1년 사이에 저에게도 동창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 동기님들에게 너무 감사드립니다... 심장병으로 죽을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그래도 동창이 있다는것을 알게되고 이런 사람을 받아준 동기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