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을숙도 이야기.
짬스탑
2007. 10. 5. 19:46

저도 대한민국의 국민인지라 예전에 내가 나이가 스무살 되던해에 국민의 4대 의무중에 하나인 병역의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가방끈이 짧아서 방위라는 병역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은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내가 어찌 병역의무에서 4급을 받을수 있었는지는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학교를 5년이상 다니고 6학년때에도 잠시 출석했다면 엉터리 졸업장이라도 나온다고 합니다. 왜 공부와 수업일수를 채우지 않아도 나오는가를 대강 알아보니 초등학교는 의무 교육으로서 일단 학교를 5년이상 다니면 다 나온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셔서 초등학교 5학년때에 감천에서 본적지인 부산의 좌천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좌천동에는 초등학교가 없고 수정동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학교가 만들어져서 6학년때 좌천초등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좌천초등학교 1기생이지요... 그런데 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도저히 중학교 보낼 형편도 않되고 아버지가 중풍 몸져있으니 약값이며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니 살림이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좌천동 산 꼭대기에 판잣집에 그것도 삯월세로 방을 얻어서 봉지 되밖쌀을 팔아다 먹어야 하는 형편이라서 도저히 내 입이라도 덜고 앞으로 먹고 살려면 뭔가를 해야 겠는데 나이는 어리고 할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사는 형이 이 딱한 소식을 접하고 자기가 다니는 귀금속 세공 공장에 나를 취직 시켜서 지금말로 하면기술자 밑에 시다바리 시키는 것을 한자리 소개 해준것입니다. 그 당시 월급이라야 뭐 큰돈이 되겠습니까... 귀금속 세공은 그 때도 알아주는 기술이라서 월급을 논할 정도도 아니였습니다. 그냥 금방이라 불리는 공장에서 꼬마 시다바리였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그만 학교는 사요나라 해버린것입니다. 졸업은 무슨 졸업 공부도 6학년 1학기도 다 못마친상태로 끝나버렸습니다. 지금 생각 하면 그 때 어려워도 부모속 뒤집어가며 공부를 계속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러면 인생이 또 바뀌어서 지금의 우리 가족을 못이루고 다른 인생을 살겠지요...
일단 그렇게 저는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친구들이 나를 찾아와서 학교에 한번 오란다고 하여서 갔더니 선생님이 졸업장을 받아놓았다고 하시면서 잘 살아라하시며 주시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법정 수업일수 미달인데도 졸업장이 나왔다는것입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초등과정은 국민의 의무로서 학교 조금만 다니면 누구나 다 나온다고 합니다. 그 것도 모르고 나이들어서 신체검사 갔다오고 4급을 받아서 방위 판정을 받았습니다. 스무살이 되던해에 내 생일이 낀달에 (8월달) 소집 명령을 받아서 사랑하는 집사람과 아들을 두고 해운데 53사단 지금의 해운대 신도시 아파트 자리에 있는 방위 교육대에 머리 빡빡 깍고 입소를 하였습니다. 팔월의 뜨거운 햇살에 귀는 다 익어서 허물이 벗겨지고 머리는 맨땅에 자주 박아서 머리에 손바닥만한 껍질이 비듬같이 일어납니다. 교육중에는 물도 못마시게 합니다. 원래 물퉁이였던 저는 쓰러질것같은 갈증에 목말라하면서 논바닥에 고인물을 엎드려서 조교몰래 먹기도 했습니다. 다른 전우들은 이 논바닥의물이라도 마시다가 조교한테 걸려서 정말 뒤지게 맞습니다. 이건 물 마시는것을 참는 훈련인데 누구 마음대로 물을 먹었느냐고 하면서 워카발에 체이고 얼차려에 얼반 죽습니다. 그렇게 심하던 교육도 어느덧 3주가 지나서 끝이났습니다. 마지막 4주째는 집에서 출퇴근 하면서 1주일간 유격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4주가 끝나면 자대배치를 받아가는데 저는 감천과 가까운 장림 시장넘어서 있는 지금의 무지개공단 쪽 산위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장림 무지개 공단쪽으로 강 쪽으로 정말 멋진 도로가 잘 뚫려있지만 그 때는 다대포까지 길이 없고 해안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대포 간첩침투사건이 나고 얼마되지않아서 군사 경계가 심할때였습니다. 그 중대는 다대포와 을숙도 까지 경계근무를 관할하는 중대였는데 저는 그 곳에서 또 소대초소도 아니고 분대초소로 배치되었습니다.
그 곳이 어디매냐면 바로 을숙도 앞에있는 "시온섬"입니다. 이곳이 왜 시온섬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부산에 계시던분들은 아시겠지만 을숙도 바로앞에 조그만 섬이 철새 전망대도 있고 근처에 에던공원이라고 젊은이들을 위한 통기타 라이브 주점이 많았던곳으로서 당시 맥주와 막걸리가 전성기를 구가 하던 시절 바로 1980년의 가을입니다. 이 동네에 배치를 받아서 오니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하단에서 내려서 시온섬 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했는데 가는 도중에 그 곳에 하단 재첩국이 유명한 선착장이 있었습니다. 이섬에는 유일하게 배추무우 그리고 큰 대파를 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매립되어서 가락타운 아파트가 들어서고 했지만 그 당시는 갈대가 무성하게 피어있는 정말 갈대숲이었습니다. 청소차들이 주차하는 자리였고 뒤로는 신평뒷산 동메산이 버티고 있고 서쪽산(진해성산)쪽에 노을이 물들면 위병소 위에서 근무를 서면서 보면 이런 장관이 없습니다. 이을고 가을이 깊어가면 얼음이 얼기 시작합니다. 하얀 큰고니와 청둥오리 가창오리들 그 얼마나 많은 철새무리들이 해지는 노을진 하늘을 무리지어서 날아갑니다. 입구 초입에 갈대로 역은 방갈로 같이 생긴 술집에서는 나또래 아니면 나보다 좀 나이를 더 먹은 사람들이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며 테이트도 즐기고 술에 취해서 몸도 못가누고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갈대밭에서 우리는 경계근무를 했습니다. 철새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조망대 철탑에 올라가서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배치받아서 올때 활짝핀 코스모스는 어느덧 꽃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옵니다.
시온섬은 모래로 된 삼각주 섬이기에 삽이 잘들어갑니다. 10월이 다 갈즈음에 땅을 파서 단지도 묻고 구덩이 파서 무우도 묻어두고 머리털나고 처음보는 무우구덩이 위에 짚을 엮어서 무우가 숨쉴수 있게 만들어주고 어디에 묻어두었나 표를 하는 지푸라기 덮개를 씌웠습니다. 이제 강바람이 바닷바람과 만나는 이곳에 삭풍이 휘몰아칩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그 많던 철새들도 날이 너무 추워서 다들 갈대숲으로 몸을 피하고 청둥오리가 강물속으로 자맥질 헤데며 지렁이롸 물풀의 뿌리를 잘라 먹는다고 한창입니다. 이 지역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으로 아직 하구언 다리가 만들어지기전이라서 만조때는 바다의 짠물이 염기를 머금고 멀리 삼량진 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합니다. 저는 주간 근무만을 했습니다. 밤에는 야간조가 있었기에 어떠한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곳은 어로 조업이 금지된 지역인데 동네 주민이 주낙을 놓아았는데 낚시 바늘에 있는 미끼를 먹으려고 청둥오리가 낚시에 걸려많이 죽었습니다. 분초소장이 그 동네 배를 잡아서 선장의 선박 서류를 빼았아버립니다. 이 선박 서류가 해양경찰서로 넘어가면 불법어로 행위로 엄청난 벌금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통통배선장은 분초장에게 사정사정을 하고서 담배 몇보루 사다주고 잡아놓은 고기 좋은것 다 갖다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서 풀려났습니다. 그해 겨울은 무지 무지 추웠습니다. 부산이 영하 11도 까지 내려가서 낙동강가에가 얼어붙어서 바닷물이 가장자리 언저리가 살얼음이 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신평은 산 꼭대기로 교육을 떠납니다...
어린시절 지금은 육지가 되어버려서 찾을수는 없지만 철새 전망대가 있는 시온섬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자꾸 납니다. 남들은 군대 생활도 아닌 방위 라지만 해안 경계는 엄청나게 군기쎄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월이 되면서 중대 이동으로 우리가 신평 교육중대에 올라가고 그 곳에서 교육을 받던 중대와 임무를 교대 하는것입니다. 우리는 4개월동안 뛰고 굴리고 사격에 각개전투며 모든군사 교육을 전중대원이 받습니다. 현역병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입니다. 현지에 내려와서 근무 보는것과 교육중대는 넉달동안 매일 교육만 받으니 다시 훈련소에 입대 한것과 같다고 보면 되지요. 이곳에는 모든 물자가 넉넉하지 못해서 현역병들이 담배를 안가져오는 방위병을 못살게 괴롭힙니다. 저도 담배를 못 피우니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겠습니까..... 그 해에는 눈도 부산에 많이 왔습니다. 눈이란것도 치워보고 말입니다. 갈대만 보고 좋았던 시절의 어려움이 이젠 가을의 냄새로 지나간 추억의 한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며 코스모스가 다시피면 나도 제대한다 이놈들아 하고 이를 악 물었던 기억이 씁쓸하게 납니다. 그러다 보니 해가 바뀌어서 고참쯤 되니 코스모스는 피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