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청첩장이 도착했습니다..
감개가 무량합니다...
날이 요근래 들어서 몹시나 추운날이 계속되고있는가운데
드디어 오늘 청첩장이 도착했습니다.
심장병이 있는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
처음에는 여기까지는 꿈을 꾸지 못한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아들이 언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독립하는모습이나 볼수 있을까
많이 걱정했는데 나이도 얼마되지않은 아버지로서 더구나 약 7년전에 알게된
심장병에 의사도 고개를 갸우뚱 하고 의심(불안)스러운 사람이었는데 ..
이렇게 아들을 멀쩡하게 장가를 보내는 날이 다가와서 청첩이라는것을
머리털나고 저나 우리가족들중에서 찍어본것은 처음있는일이라서
많이 어색하고 어리둥절 합니다..
150장이나 가지고 왔다는데 과연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나를 심판받는느낌입니다.
사람이 제대로 살았으면 이것이 모자랄것이고 내가 좀 질이 나쁘고 뺀질하게 살았으면
어디에 불쑥 청첩을 내밀기가 부끄러워지겠지요...
그래도 저는 살면서 남의것을 빼았거나 욕을 들을 만한일은 거의 하지않고 살은것같은데...
모르겠습니다...받으시는분들이 과연 어떻게 판단하실런지요...
우리 아들과 나의 나이차이는 그리많이나지는 안습니다.
내가 집사람을 첫사랑으로 만나 좀 일찍 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자식이 빨랐습니다.
남들은 그냥 같이 살다가도 헤어지고 또만나고 하는데 우리는 첫사랑이지만
서로를 책임지는 자세나 정신상태가 올바랐던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 살림을 시작한지도 어느세 33년정도 되었습니다.
그 중간에 서로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서로가 격려하고 힘을 보태서
오늘이 있게끔 만든우리집사람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그중간에 내가 병역의무를 할때 우리아들이 약 3~4살 정도 된것같은데
내가 방위근무를 하러가니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서 집사람이 화장품 외판이라도 해서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노력하던중에 아이를 작은딸애는 업고
아들은 걸리고 다니면서 화장품외판을 했습니다.
사실 이게 지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저는 일요일이면 남의 차 대리(스페어)기사나 조수를 해서 차비를 벌어서
살림에 보태서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커가면서 이제는 옆집에 낮시간에 맡겨놓고는 옆집아주머니께
아들의 식사를 좀 챙겨먹일것을 부탁하고 나는 군부대에 집사람은 화장품 팔러다니면서
그렇게 키운 아들이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장가를 간다고 합니다.
내가 결혼할때도 청첩장같은것은 꿈도 못꿨습니다.
그냥 살면서 하는 결혼 조용히 사진이나 찍는다는 의미에서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연락하고
우리네 집안에는 친척분들이 거의 없었고 우리집사람쪽의 친척분들 몇분모시고
전체 하객이 약 30여분 정도 되는걸로 기억합니다.
이제 우리 아들이 장가를 가는데 자기 아버지마냥 이리 힘든 시절을 보내는것도 아니고
이제는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서서 굴러가는 수레같이 수월하게 신혼살림이 시작될것같습니다.
청첩이라는 것이 남들에게 본인이나 자녀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안내문인데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좀 다른것같이 변질된것도 문제입니다.
저도 청첩장을 많이 받아보지만 그 청첩장중에는 부모란에 한분만 기록되고 있는
그런 청첩장을 자주 보았습니다.
제가 이런 청첩을 볼때는 아,! 부모님두분중에 한분만 계시구나 하고 느끼지만
그 청첩을 찍으시는 당사자들은 많이 가슴이 아프실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그것을 찍어보니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복이 많아서 아직 살아있으니 이 또한 감사해야할일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제 나이가 결혼식을 자주 참석해야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형님이고 친구네고 좀 먼친척분들 또 친목계원님들 직장에서의 동료들.등등..
저도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특히 제가 나이가 어려서 친목계 같은곳에 총무를 많이 맡아봤습니다.
그러다보니 남들은 바빠서도 참석이 어렵고 좀 서로 꺼끄로운 상대라서 꺼리고
다들 피해가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나는 직책을 총무를 맡다보니 남들은 참석을 못해도 총무만은 초상이든 결혼이든
개업이든 어디든 무조건 가야합니다.
총무의 직책이 참 어렵습니다.
지금도 우리 어릴때 친구들의 친목계를 총무를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 10년째 하고 있습니다.
전에 살던 아파트의 친목계는 영감님들만 계시고 내가 제일 어리다보니
이것도 한 10년째 하고 있습니다.
내밑에 막내가 들어오기까지 받아주실분이 없다고 합니다.
이 총무직을 맡아보니 행사는 무조건 참석해야합니다.
그동안 저도 참 많이 참석했는데 이번에는 제가 혼주의 자격으로 서니깐
친목계를 신경안써도 될것같습니다.
요즘은 솔직히 부조금도 신경 쓰이는 부분입니다.
요즘은 원체 돈의 가치가 떨어지다보니 예전에는 식사가 한그릇에 3천원이면
해결하던 것이 요즘은 한끼에 5천원짜리 하나가지고도 모자랍니다.
이런지경이 되다보니 철철이 받는 청첩장은 납부고지서로 보이는것은 당연지사이고
아예 세금고지서 라고 말하시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다보니 저역시 실감합니다.,.
시절이 많이 변했습니다.
저와 저를 아시는 많은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오셔서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앞으로 커나가는 젊은 신혼부부의 축복해주셔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냥 이글을 읽어주시는분들은 누구나 오셔서 젊은 신혼부부의 앞날을 축하해주시고
그냥 오셔서 잔치국수나 한그릇 같이 하시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예전에 내가 한 스무살이 좀 넘었을적에 삼천포 쥐치포 만드는 공장에 쥐치를 실고 갔다가
하차후에 삼천포에서 나오는길에 사천군의 용현면의 큰길가에 차일포장을 치고
큰길을 지나가는 차들을 손을 흔들어서 다 세우시고 오늘 이집에 딸이 결혼했다고
길을 가시는분 모두 잔치국수 한그릇씩하고 가라고 차를 세웠다는것입니다.
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입니까..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든 아시는분이든 모두 축하를 해주시기만 하면된다고
고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길옆에 차를 세워놓고 저도 친구도 따라오면서 잔치국수를
얻어먹은 기억이 20여년정도 지난 지금도 머리속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제는 그런 풍속이 있는지 없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저의 마음은 그때를 생각합니다.
오늘은 서울쪽에 있는 처가네 친척들의 주소를 물어보는데
핸드폰이 뜨끈뜨끈할때까지 전화를 했습니다.
저의 친척들은 원체 내가 못사니까 연락이 두절되어버렸고
그래도 처가네 식구들은 많이 연락이 됩니다.
이런 큰 가족행사가 있기까지의 모든 공은 역시 우리집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잘 지키고 살아온 결과가 이제 이런 보람으로 나타나는가봅니다..
요즘도 힘들게 일하고 늦게마치고 하지만 내가 저녁이면 꼭 퇴근만큼은 신경을 씁니다.
해줄수 있는것이 그것뿐인까닭입니다...
이제 화장실수리에 페인트 칠에 도배 장판까지 마쳤고 집수리도 어느정도 끝나가고
실내등달고 씽크대만 설치하면되는데 이번 월요일이면 완료되겠습니다.
아들네 집이 우리집보다는 훨씬좋지만 자기네들이 알콩달콩 잘살아줄것만을 기대합니다.
더이상 바랄것도 없습니다.
어렵게 살아온 세월 청첩장을 손에 든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한넋두리를 풀어봤습니다.
이제는 자식걱정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가는 아들에게 잘살아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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